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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전환점… 김정자 LA카운티 노인복지 커미셔너

교수 꿈→엔지니어→비즈니스
"컴퓨터 실력으로 차별 이겼죠"
공항 수화물 위탁 서비스업
칠순 넘었지만 왕성한 활동

모교에서 교수가 되겠다는 꿈을 안고 미국으로 유학 왔다가 여성 사업가로 변신해 칠순이 넘은 지금까지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는 여성이 있다. 바로 김정자 LA카운티 노인복지 커미셔너.

LA국제공항과 북가주에 있는 오클랜드 공항, 콜로라도주의 덴버국제공항에서 사업을 했던 그녀는 원래 순수 수학 전공자. 모교인 이화여대에서 교수가 되기 위해 미국 유학을 왔다가 결혼과 임신으로 진로가 변경되자 미국 회사에 엔지니어로 취직하며 미국 생활을 시작했다.

김 커미셔너는 "대학 졸업후 배운 컴퓨터 공부가 재미있어서 미국으로 왔다가 결혼으로 공부가 늦어지면서 교수의 꿈을 포기했다. 그래서 취직했는데 당시에는 컴퓨터를 조금만 알아도 스카우트해가던 시절이었다"며 "당시에는 대학 교수가 직장에 찾아와서 학생들에게 컴퓨터를 가르쳐줬을 만큼 관련 학과 학생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다"고 설명했다.

아시안에다 여성이라는 이중 핸디캡을 김씨는 실력으로 이겨나갔다. 8년 후에는 '던앤브래드'라는 방계회사의 시스템 애널리스트로 옮겨 전 세계 항공업계에서 사용하는 시스템을 짜고 관리하는 업무를 맡으며 승승장구했다.



김 커미셔너는 "다른 엔지니어들은 일 년에 걸쳐 진행하는 프로젝트를 나는 6개월이면 끝냈다. 실력이 있기 때문에 임금 협상 등에서도 당당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엔지니어로 잘나가던 그녀가 비즈니스에 뛰어든 건 80년대 초 LA로 이주한 후부터다. 봉제업체에서 이용할 수 있는 컴퓨터 시스템을 개발해놓고도 판매를 제대로 못해 힘들어하던 한인 개발자와 우연히 동업을 시작한 그녀는 잠재돼 있던 마케팅과 세일즈 실력을 발휘했던 것이다. 그녀는 본격적으로 사업체를 알아보며 사업가로 진로를 변경했다.

김 커미셔너는 "각 대학에서 컴퓨터 전공생들이 쏟아져 나오는 것을 보면서 사실 새로운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며 "공항 수화물 위탁 서비스를 사업목표로 삼고 주요 공항을 답사했다. 담당자에게 전화를 걸고 방문해 사업 내용을 설명하러 다니며 기회를 잡기 우해 노력했다"며 당시 쏟았던 열정과 도전정신을 설명했다.

오렌지카운티에 있는 존 웨인 공항에서 시작한 수화물 위탁 서비스는 그후 LA국제공항으로 확대됐고 다시 북가주의 오클랜드공항, 덴버국제공항에도 오픈했다. 하지만 어려움도 겪었다. 9·11 테러 사건 발생 후 수화물에 대한 규제와 조사가 강화되면서 위탁 서비스를 신청하는 여행자들이 줄어 렌트비를 제대로 낼 수 없을 만큼 운영이 힘들어졌다. 하지만 김 커미셔너는 특유의 열정과 도전정신으로 이겨냈다. LA시의회에 찾아가 어려움을 설명해 렌트비를 면제받은 것이다.

김 커미셔너는 "당시 내가 받은 교훈은 '목표를 세우면 노력을 많이 해야 한다. 공짜는 없다'와 '노력하는 자만이 기회를 얻는다'는 것이다"라며 젊은 여성들을 향해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도전하고 최선을 다해 노력할 것"을 조언했다.

은퇴를 앞둔 연령이지만 지금도 LA와 덴버국제공항을 다니며 수화물 위탁 서비스와 소매업체를 운영하고 있다는 김 커미셔너는 "활동할 수 있을 때까지 일할 것이다.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한인들이 정부 조달 계약에 도전할 수 있도록 돕고 싶다"고 말했다.

장연화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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