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글 표준 자판 극비 탄생 민간업자 방해 이겨냈죠"
69년 대통령 특명으로 제작
LA거주 황해용씨
"과학기술처에 들어간 다음해인 69년 5월이었습니다. 갑자기 대통령 특명으로 제게 한글 표준 자판을 만들라는 겁니다."
당시 직급으로 '2을' 연구조정관이었던 황해용(사진)씨는 자신이 책임자로 임명된 프로젝트가 이미 상공부와 문교부(현 교육부)에서 표준 자판을 각각 만들다가 돈만 까먹고 실패했다는 것을 들어서 쉽지 않은 과제라는 것을 직감했었다고 한다.
당시에는 공병우식 김동원식 등으로 타자기 자판이 달라서 여러가지 자판을 다 익힐 수도 없는 등 문제가 많았다는 것이다. 또한 이들이 시장을 장악했지만 배우기도 쉽지 않았다.
황씨는 "누가해도 해야 할 일인데 제게 떨어진 것"이라며 "당시 상황은 정부가 나설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회상했다.
당시 시장 점유율 75%였던 공병우식은 3벌씩이었다. 속도도 빨랐다. 하지만 받침이 있는 글자와 없는 글자가 모양이 같아서 문제였다. 예를 들면 '일'과 '이'가 현재는 모음 'ㅣ'가 길이가 다르지만 3벌식은 같다. 결국 문서 위조가 가능해진다. 표준으로 삼기에는 부담스러운 것이다. 반면 15%를 점하고 있는 김동우식은 5벌식이라서 배우기가 어렵고 너무 느렸다.
사실 수동식 타자기로는 자판이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다. 하지만 황 연구조정관(당시)의 생각은 달랐다. 빨리 배우고 아름다우며 향후에 컴퓨터 시대를 대비해야 한다는 것이다. 당시 과학기술처에 있었기에 미국 등의 컴퓨터가 어떻게 발전하는지 알고 있어서 향후 컴퓨터 한글 표준 자판이 필요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 공병우식보다는 느리고 김동우식보다는 빠른 4벌식을 채택했다. 물론 컴퓨터용 자판으로 2벌식도 마련했다. 후에 4벌식은 수동 타자기의 퇴장과 컴퓨터의 등장으로 사라졌지만 2벌식은 아직도 우리가 쓰고 있다. 아래아 한글 초기버전에는 3벌식도 채택해서 3벌식 사용자를 배려했지만 요즘은 3벌식을 그리 많이 사용하지 않는다.
자판에 비밀도 있다. 한글학자 외솔 최현배 선생의 글자 사용 빈도를 사용했는데 서울 표준말 사용자 기준이다. 왼손에 자음이 몰려 있는 것도 소문과는 달리 태스크포스에 참여한 인간공학자의 과학적 근거로 배열된 것이다. 만약 평양말이 표준인 사람이라면 표준 자판이 부담스러울 수 있다는 것이다. 물론 북한에서는 다른 자판을 쓴다.
황씨는 "사실 자판 만드는 것은 한글 창제에 비하면 너무 쉬운 일이었는지 모른다"면서 "하지만 기존 자판을 만든 민간사업자들의 방해를 이겨내고 표준으로 확정하고 보급하는 것은 한글 배포만큼 쉽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황씨는 1982년 미국에 이주해왔고 지난 1990년에는 일시귀국해서 한국자동차 부품 종합기술연구소장으로 5년간 일하기도 했다. 현재는 LA에 거주하고 있다.
글·사진=장병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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