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삶의 향기] 방하착! 내려놓으시게

꽃보다 단풍. 당나라의 시인 두목은 서리 맞은 단풍이 봄꽃보다 아름답다고 했다. 눈앞에 펼쳐진 풍광이 그랬다. 그것은 물감으로 그린 아름다운 한 편의 시라 해야 마땅할 것이었다. 해 저물어 왠지 심기가 소슬해지면 언제나 가을이었다. 시름시름 가을을 앓으며 그런대로 버티다가, 불현듯 이 가을이 못내 아쉬워 시 한수 가슴에 담아 일탈을 결행했다.

캘리포니아의 등뼈, 시에라 네바다의 동편에 자리한 소박한 마을 비숍과 그 이웃은, 에스펀의 군락지로 가을이면 또한 가을을 앓는다. 비숍을 품은 험산 준령의 가슴 언저리에는 사브리아 레이크를 위시해 수려한 호수들이 어깨를 맞대고 있다. 산의 들머리에서부터 골짜기를 따라 구름처럼 피어오른 에스펀의 황금 물결, 그 몽환적 분위기에 잠시 넋을 잃고 만다.

가없이 멀어져간 푸르른 하늘, 웅비하는 기암절벽과 속살을 내비친 잔잔한 호수, 해맑은 햇살과 살랑이는 상큼한 바람, 그들과 아우러져 환장하고도 남을 ‘불타는 고혹’이, 아니 그 ‘아름다운 소멸’의 향연이 천지간에 한창이었다.

이제 '버려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순간부터/ 나무는 가장 아름답게 불탄다/ 제 삶의 이유였던 것/ 아낌없이 버리기로 결심하면서/ 나무는 생의 절정에 선다' (시인 도종환의 ‘단풍 드는 날’ 중에서)



그렇다. 단풍은 소멸의 전조. 머잖아 찬 서리 설한풍이 휘몰아치기 전에 나무는 온전히 자신을 비울 것이다. 미련을 부려 무거워 진 것은 꺾기고 미련 없이 비운 것은 살아남기 때문이다. 철학자 사르트르도 “가득 찬 것은 죽어 있는 존재이고 계속해서 비워내는 존재가 살아 있는 존재”라고 했다.

나무에게 소멸은 스스로 ‘내려놓음’이고 ‘비움’이다. 다가올 봄의 생성을 기약하는 자발적 침잠이며 그것은 억겁을 통한 자연의 자연한 변주이다. 해서 “방하착/ 제가 키워온/ 그러나 이제는 무거워진/ 제 몸 하나씩 내려놓”는 것이다.

방하착(放下着)은 선가의 선어로 내려놓아라. 비우라는 의미다. 대개의 고통은 마음의 온갖 부정적 잠세력에서 비롯된다. 그것의 단초는 콘크리트화된 아집이다. 그 아집을 내려놓으라는 추상같은 언명이다. 나아가 놓고 놓다가 종국엔 놓겠다는 생각마저, 놓았다는 그 생각마저도 놓음으로써 적멸의 평온, 그윽한 고요를 누리라는 자애로운 충언이기도 하다.

요컨대 방하착은 무집착, 무소유의 암시적 표출이며 아집과 번뇌의 권세에서, 그 암울한 속박에서 해방되는 종교적 구원의 토대가 되기에, 그것을 ‘신성한 무관심’이라 해도 되겠다.

선가에는 이 선어의 원조라 할 만한 예화가 전해 내려온다. 중국 당나라 때, 어느 날 엄양존자가 조주선사를 친견한다.

엄양존자 대뜸, “한 물건도 가지고 오지 않았을 때는 어떠합니까?”.

조주선사 엄중히, “내려놓으시게!”.

엄양존자 퉁명스레, “이미 한 물건도 가진 것이 없는데 무엇을 내려놓으라는 지요?”.

조주선사 나직이, “그러면 지고 가시게나”.

박재욱 / 나란다 불교센터 법사
musagusa@naver.com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