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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향계] 노인이 행복한 나라

이종호/논설위원

#. '어버이 살아실제 섬길 일란 다 하여라/ 지나간 후면 애닯다 어찌 하리/ 평생에 고쳐 못할 일이 이뿐인가 하노라.' 귀에 익은 운율, 나이 들어 뒤늦게 공감, 절감하는 시조다. 조선 선조 때 송강 정철이 강원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백성들을 위해 지었다는 훈민가 중의 하나다. 훈민가의 마지막 16번째도 노인 공경 시조다. '이고 진 저 늙은이 짐 풀어 나를 주오/ 나는 젊었거늘 돌이라도 무거울까/ 늙기도 서럽거늘 짐조차 어이 지실까.' 요즘 세상 이런 갸륵한 마음 가진 젊은이들 과연 얼마나 될까.

#. LA 한인타운의 구석구석 누비고 다니는 할아버지가 한 분 있다. 점심시간 한인 식당, 커피숍 등지에서 일주일에 한 두 번은 꼭 보게 되는 분이다. 식당에 들어오면 모든 테이블을 빠짐없이 돌며 봉지에 들고 온 물건을 팔았다. 하지만 대부분 묵묵부답 외면, 아니면 "됐어요"라며 거절이다. 그럼에도 할아버지는 꿋꿋이 옆 테이블로 향하고 다음 식당으로 발길을 옮긴다. 할아버지를 둘러싼 소문도 무성했다. 엄청난 알부자라더라, 벤츠 타고 출근해 차 세워두고 옷 갈아입고 나온다더라, 당뇨 때문에 걸으려고 일부러 저렇게 다닌다더라 등등. 하지만 확실히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언제부턴가 그 할아버지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 한인타운에서 좀 떨어진 패스트푸드점에서 우연히 할아버지를 봤다. 아침 출근길, 커피를 사러 잠시 들렀는데 예의 그 익숙한 몸짓이 눈에 들어온 것이다. 그런데 늘 손에 들려있던 물건은 보이지 않고 그냥 맨손이었다. 눌러 쓴 모자 밑으로 삐져나온 머리는 전보다 더 하얗고 몸도 많이 수척해진 모습이었다.

"안녕하세요" 인사를 했다. 처음엔 못들은 척이다. "이제 물건은 안 파시나 봐요"라며 한 번 더 말을 붙이니 그제야 짧게 대꾸를 하신다. "교통사고 당했어요. 다섯 달 쯤 쉬었어요. 이젠 그렇게 못 다녀요. 물건 사올 돈도 없어요" 라며 말끝을 흐린다.



몇 마디 더 여쭈었다. 올해 80세라고 했다. 미국에 온 지는 35년. 이것저것 많은 일을 했었고 지금은 혼자 산다고 했다. 한국에 자식이 있다고 말할 땐 목소리가 살짝 떨렸다. "미국은 돈 없으면 거지예요, 거지." 그렇게 말을 맺고 할아버지는 돌아섰다.

#. 장수시대다. 축복인 만큼 그늘도 짙다. 더 이상 국가나 사회가 노후를 책임져 주지 않는다. 가족의 부양문화도 사라졌다. 나름대로 열심히 살았지만 남은 것은 별로 없다. 건강도, 돈도, 일도, 가족도, 친구도…. 그렇게 준비 안 된 노년을 맞는 사람들은 자꾸만 늘어 간다.

우리 주위에도 고달픈 노인들이 많다. 평생을 부지런히 달려왔을 테지만 여전히 쉬지 못하는 몸 고달픈 노인들, 떨치지 못한 노욕 때문에 아직도 영혼 고달픈 어르신들, 내 맘대로 안 되는 자식 때문에 여전히 마음 고달픈 부모님들이 많다. 한국에 있었다면 좀 나았을까. 뉴스를 보면 오히려 한국은 더 한 것 같다. 노년층의 절대적 지지 속에 출발한 박근혜 정부다. 하지만 노인빈곤, 노인자살률 1위의 오명은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지 않은가.

노인은 서럽다. 사회적, 신체적 쇠퇴와 어쩔 수 없이 맞닥뜨려야 하기 때문이다. 필연적으로 병고(病苦), 빈고(貧苦), 고독고(孤獨苦), 무위고(無爲苦)와 싸워야 한다. 병 들고 돈 없고 외롭고 할 일 없는 노년의 이 4가지 고통을 줄이는 것이 노인문제 해법일 테지만 만만치가 않다. 열심히 살아온 어르신들, 하지만 어느새 약자가 되어버린 그들을 좀 더 배려하고 관심 가져주는 사회야말로 우리 모두가 꿈꾸는 아름다운 세상일 것이다. 노인이 행복한 그런 나라는 언제나 가능할까.

총총히 맥도널드 문을 나서던 할아버지의 초라한 뒷모습이 자꾸만 눈에 밟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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