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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나는 행복한 이발사

이영주/수필가

발코니의 화분들을 안으로 들여 놓고 가위를 든다. 시든 잎사귀를 잘라내는 일부터 가지를 치고 훌쩍 자란 놈은 키도 낮춰 준다. 그렇게 '이발'을 해주고 나면 무성했던 화분들이 한결 여유롭고 산뜻해진다. 이발소에 다녀와 인물이 훤해지는 남자들에 비할 바가 아니다.

나는 꽃을 좋아한다. 아파트 살림이라 화분에 의지하는 수밖에 없지만 그래도 화분 속에서 커가는 꽃을 보는 즐거움도 만만치 않다.

세 그루 있는 사랑초는 사람을 아주 귀찮게 하는 고약한 놈이다. 1년 내내 보라색 꽃이 피는 덕에 케이크나 과자를 구워 선물할 때 훌륭한 장식 노릇을 해주는 대신 끊임없이 손을 봐줘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누렇게 죽은 가지들이 흰머리처럼 내려앉아 잡초로 무성한 폐가같은 모습이 된다.

잎사귀가 길고 뾰족한 열대식물은 가수 양희은씨가 서울로 돌아갈 때 주고 간 것이니 거의 20년은 되었나 보다. 처음 왔을 때 가지가 이리저리 휘었는데 오래 두고 보니 그게 이젠 예술작품처럼 멋스러워져서 보는 이들마다 칭찬한다. 돈나무는 양기가 샘처럼 솟는지 잎사귀만 꽂아도 쑥쑥 커서 입양을 정말 많이 보냈다. 그래서 화분도 가장 큰 것으로 차지하고 있는데 지금도 화분이 터질 듯이 번식을 계속한다.



제일 비실비실한 놈은 행운목이다. 아파트에 이사 와서 샀던 것인데 한 때는 꽃을 피워 나를 기쁘게 해주었다. 행운목은 향이 어찌나 진한지 우리집에서 꽤 긴 거리인 엘리베이터에서 내릴 때부터 그 향이 느껴졌다. 그런데 한두 번 꽃이 핀 이후로는 다시는 꽃구경을 못했을 뿐더러 아예 뿌리가 썩었는지 다 죽고 한 대궁이만 남았다. 다 내 탓이다. 집을 비울 때 물을 별로 타지 않는 행운목에도 무지막지 물을 준 탓이다.

오늘 새삼 화분 이야기를 하는 건 돌아가신 박완서 선생의 큰따님 원숙씨가 선생의 산문집 '호미' 개정판을 보내와서다. 오래 전 발간됐던 그 책에 원숙씨가 그린 꽃그림들이 삽화처럼 더해진 따뜻한 책이다. '따뜻한 책'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첫째 선생이 70대에 쓴 글들이라 인생에 대해 날카롭고 명민한 붓놀림보다는 따뜻하고 곰삭은 지혜와 애정으로 가득 찼음이요, 둘째는 생전의 어머니를 그림자처럼 보필해온 딸이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꽃그림에 담아 어머니의 글에 꽃단장을 시켜드렸음이다.

선생은 책에서 호미를 들고 마당을 가꾼 이야기를 자식 사랑하듯 풀어놓으셨다. 나무들과 말 걸고 얘기 나누셨던 선생은 생이 어쩌면 호미 들고 김매듯 살아온 것 같다면서 "호미자루 내던지고 싶을 때도 많았지만 안팎으로 김맬 터전이 있었던 게 복이었다"고 술회하셨다. "날마다 나에게 가슴 울렁거리는 경탄과 기쁨을 자아내게 하는 자연의 질서와 그 안에 깃든 사소한 것들에 대한 애정과 감사를 독자들과 나눌 수 있다면 더 바랄게 없다"고 하신 말씀이 참으로 가슴에 진하게 울렸다.

선생에 비하면 나는 생초짜, 그렇지만 우리 집 화분들과 소통하며 가끔 이발도 시켜주면서 자연에 대한 외경심을 키워온 것에 조금은 뿌듯하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행복한 이발사라고 자랑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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