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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자기고] 해저문 날 목화밭에서




애틀랜타의 한해가 저믈어가면 황금의 수의 입고 길떠나는 갈 잎새처럼, 어디론가 홀로 길 떠나고 싶어 어제는 목화밭을 찿았다. 철이 좀 늦어 행여 밭을 갈아버리지나 않았는지 마음 설레며 떠나는 시골길에는 황금 물결로 곱게 물든 가을이 깊어만 간다.
한적한 시골길에 들어서니 사람은 없고 갈빛에 타는 들꽃들의 향연이 길손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빈산에 사람없고, 낙엽이 가득하네’(空山無人, 落葉滿空山)라는 소동파의 시 한수가 나그네 발길을 재촉한다.
이 가을 그냥 내 마음 하나 비우고 싶었다. 무얼 그리 바쁘게 허둥대며 살아왔는지…. 나를 잃고 살아온 한해를 돌아보면, 산다는 축복보다는 상처투성이의 삶의 흔적들을 씻어내고 싶은 마음뿐이다. ‘공산무인’이란 씻어낸 흔적도 없는 ‘비움’아닐까. “본래 무일물인데, 씻을 것이 어디 있나”는 선승의 깊은 그 한마디, 붉게 탄 깊은 산속, 낙엽쌓인 빈산에 묻혀 한밤을 지새고 싶은 나그네 마음을 설레게 한다.
가을에는 누구나 어디론가 길 떠나고 싶은 마음이 어찌 소동파뿐이랴. 이 가을 홀로되고 싶은 내 속내를 드러낸 소동파의 시 한구절이 이 가을 낙엽처럼 나를 취하게 한다.
‘하늘과 땅 사이 모두 주인이 있어/내 소유란 터럭 하나도 가질수 없으나/강물위 맑은 바람, 산 사이 밝은 달은/들으면 소리되고 보면 그림이되어/가져도 말리는 이 없고, 써도 없어지지 않네/이는 조물주가 만든 무진장의 축복이니/그대와 내가 누릴 축복이라.’


소동파의 ‘적벽부’란 시의 일부이다. 손에 쥔 쥐꼬리만한 물질에 취해 사는 현대인들에게 들려준 존재속에 주어진 끝없는 부유함이여. 이 가을 숲에 불어오는 쓸쓸한 바람소리, 깊은산 계곡 물흐르는 소리, 겨울 둥지를 찿아가는 새소리, 바람소리, 가을소리는 인생의 겨울이 오기전에 들리는 정이 듬뿍 담긴 가슴울림의 소리들이다.
잠시 머믈렀다가는 세상, 천지간의 외로움을 달래던 옛 선비들은 가을 하늘 낙엽에 시를 쓰고 길을 떠나간다. 가을 밤 책을 읽다가 우수수 갈잎 딩구는 소리에 잠을 잃고 창문을 열어보니, 글 중간에 ‘붉게타는 갈잎 사이로 휘영청 밝은 달이 걸려있고, 쏟아지듯 별들이 잠들지 않는 밤’이라는 ‘달아 너도 이민왔니’라는 후배의 시 한구절이 가을 나그네 옆구리를 스쳐간다.
옛 선비는 “낙엽이 쌓인 빈산에 가득하니, 어디서 그 자취를 찿을 것인가”라고 물으니 “빈산을 누비시니, 본래 자취가 없답니다.”라고 답했다. 인생무상을 노래한 옛 선비들의 빈 마음이다. 이처럼 가을이 되면 우리 모두가 시인이 된다.
빈산 낙엽 속에 하룻밤 지새면, 낙엽처럼 시인이 되어, 낙엽이 쓰고간 시를 읽으며 취하고싶다. 그림같은 불타는 가을빛을 곁에 두고 사는 즐거움, 황금빛으로 불타는 애틀란타는 스모키마운틴을 병풍처럼 두르고 멀리 플로리다 바다를 발아래 두고사는 ‘명인이 사는 명당’임에 틀림없다.
시골길을 몇시간 달렸을까, 들국화 손짓하는 목장길 사이로 그리던 옛 애인을 찿아만나듯 그리움으로 타는 목화밭에는 하얗게 타는 눈쌓인 설경이 펼쳐진다. 미국 남부의 한서린 노예들의 신음 소리가 들린다. 맑고 깨끗한 시골사람들이 살고있는 그 천혜의 땅은 수많은 사연을 안고 하얗게 타고 있었다.
목화밭, 내 어머니의 젖가슴같은 따스한 사랑에 안기고싶은 보드라운 평화의 땅이여. 사람이 잃어버린 사랑을 안고 포근한 사랑의 젖가슴을 지닌 꽃들이 소리없이 눈처럼 하얗다. 폭력과 전쟁에 얼룩진 세상이 잃어버린 가슴을 하얗게 타는 마름으로 피어나는 꽃들이여.
하얀 보드라운 그 꽃가슴 목화밭에는 흰옷입은 천사처럼 서성이신 내 어머니 그리움에 목이 메인다. 타향살이 40년 세월 해마다 찿아온 내 영혼의 고향 이민의 설은 눈물로 얼룩지고, 수많은 사연들, 하고싶은 말, 속마음을 털어놓고 울기도 많이 울었다. 목화밭은 세상살이에 부족하기만한 나같은 사람이 찾는 피난처요. 버려야할 내 하소연을 소리없이 들어준 나만의 소리없는 비움의 공간이기도 하다. 소리없는 빈들의 바람이 부족한 나를 세워주는 길이요, 그리움이요, 내 문학의 스승이요, 비밀스런 나만의 공간이었다.
나는 꽃으로 태어난다면 하얀목화이고 싶다. 하얗게 가슴 따스한 솜꽃으로 태어나 수많은 사람들을 사랑과
부드러움으로 감싸줄 평화의 꽃, 목화이고 싶다. 꺾어온 목화들이 빈 겨울을 가슴 따스히 감싸줄 축복의 화신임을 감사하며, 다시 돌아와 세상속에서 목화처럼 따스한 사랑 가득 보듬고, 하늘이 내리신 축복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오늘을 살고 싶다. 날마다 새 날을 맞이하는 기쁨으로 그 감격으로 출렁이고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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