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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악 나의 동경 나의 위안]첼리스트 야노스 슈타커

송 영 / 작가

절제된 선율 뒤엔 따뜻한 인간미가…

1995년쯤으로 기억된다. 호암아트홀에서 첼로 진객의 연주회가 있었다. 야노스 슈타커 독주회였다. 그때만 해도 호암아트홀이 장안에서 손꼽히는 좋은 무대였다. 연주회 메인 곡목이 바흐 곡인지 코다이 곡인지 기억나지 않는데 그건 1부 끝자락에 끼워 넣은 짧은 곡에서 받은 인상이 워낙 강렬했기 때문이다. 프랑수아 쿠푸랭의 '첼로와 피아노를 위한 협주소곡'(Piece en Concert for Cello and Piano)인데 이른바 로코코 풍의 화사한 장식적 요소가 강한 곡을 능란하게 요리하는 연주가의 절묘한 솜씨에 흠뻑 취해버린 것이다. 이건 음악에서 받은 감동이라기보다 첼로라는 악기의 다감한 음색과 은근한 울림 그 효과를 극대화시킨 연주자의 연주 기량 이 두 가지 음악 외적인 것에서 받은 감동이었다.

그 곡으로 1부가 끝나고 중간 휴식시간이 되어 관객들이 로비로 나왔는데 그날 따라 초대객이 많았는지 홀에 얼굴이 알려진 인사들이 삼삼오오 모여 큰소리로 담화를 나누고 있었다. 나는 그곳을 피해 화장실 쪽 좁은 복도로 들어가서 혼자 방금 들었던 음악과 연주를 다시 음미하는 시간을 가졌다. 좋은 첼로 연주를 들을 때마다 떠오르는 의문 한가지가 있다.

이날도 그 생각이 떠올랐다. "온갖 관악기를 위해 많은 협주곡을 쓴 모차르트가 첼로를 위해서는 왜 협주곡이나 소나타 같은 걸 하나도 쓰지 않았지? 썼다면 첼로 역사가 달라졌을 것 아닌가."



야노스 슈타커 여러 이유로 첼리스트 가운데 내겐 가장 친숙한 이름이다. 최초 실제 연주를 그의 연주로 들었고 첼로라는 악기의 위엄과 특징 그리고 고도의 연주기교를 내게 보여준 연주가도 슈타커다. 그가 지난해 작고했다는 사실을 겨우 며칠 전에야 알게 되었는데 조금 의아스러운 느낌을 받았다. 연주 자세나 표정 등 그가 보여준 모습은 '영원한 청년'의 이미지였던 것이다.

슈타커 연주를 처음 들은 것은 한참 이전인 75년 봄이었다. 내가 본격 첼로 연주와 처음 만나는 시간이었다. 며칠 전부터 기대감으로 잔뜩 설렜다. 연주회는 이화여대 대강당에서 있었는데 당시 아직 풋풋한 신진 분위기를 보이던 피아니스트 신수정과 손을 맞췄다. 그가 첼로를 들고 꼿꼿한 자세로 무대로 걸어 나오는데 자세가 너무도 당당하고 늠름했다. 연주가의 첫 인상도 관객에겐 알게 모르게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친다. 음악이 들리기 전 그는 이미 나를 사로잡았다.

그는 큰 악기를 들고 움직이는 조각품 같았다. 고금의 첼로협주곡의 대표격인 '베토벤 첼로협주곡 3번'을 거기서 처음 들었다. 그 도도하고 융숭한 선율의 흐름에 나는 정신을 빼앗겼다. 신수정의 피아노 반주도 반짝반짝 빛이 났다. 피아노와 첼로는 한 치 빈틈없이 잘 어울렸고 첼로의 매력에 나는 흠뻑 빠졌다. 한창 나이 때 얘기지만 그날 이후 라이선스 음반을 구해 이 협주곡 3번을 얼마나 자주 들었는지 헤아리기도 어렵다.

오랜 기간 슈타커는 내게 첼로의 기준이자 모범이었지만 이 위상에 다소 변화는 있었다. 얼마 전 그의 바흐 '무반주 첼로 모음곡' LP판이 일본에서 복각돼 수입된 적이 있다. 그걸 들었는데 기대만큼 감흥이 크게 오지는 않았다. 무슨 얘기냐 하면 그 사이 관행적 연주를 깨트린 개성적 연주를 이것저것 듣다 보니 정석에 충실한 연주에 대한 흥미가 반감되었다는 얘기다. 다닐 샤프란의 '베토벤 첼로소나타 1번'을 듣고 이 곡 연주에 대한 관점이 약간 바뀐 것과 유사하다. 그런데 몇 해 전 두어 달 장기여행을 떠나 현지에서 바흐 첼로곡을 들으려고 가방을 뒤져보니 슈타커의 CD 음반이 튀어나왔다. 뭘 고른다고 작정하지도 않고 급하게 주워담은 것인데 자신도 모르게 슈타커에 손이 간 것이다. 여행의 특성상 모범 연주가 안전하고 적합할 거라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이다. 그 판단은 옳았고 한 장의 그 첼로곡 음반은 낯선 나라에서 내게 큰 위안이 되었다. 슈타커는 여전히 내게 첼로의 귀감이었던 셈이다.

정상급 첼리스트로 슈타커는 한국과 가장 친숙한 관계를 가졌던 인물이기도 하다. 그는 67년 첫 내한연주부터 2005년 연주까지 여덟 차례나 한국을 다녀갔다. 대개 일본을 거쳤다 하더라도 보통 인연은 아니다. 지금 국내 첼로 연주를 대표하는 양성원이 그의 애제자이고 그 밖에도 몇 사람 제자가 더 있다. 그가 한국을 자주 찾게 된 이유가 뭘까. 동양적 외모에 뛰어난 기량과 조금의 일탈도 허용치 않는 엄격한 연주 자세 등이 한국 관객들로 하여금 그에게 남다른 지지와 갈채를 보내게 한 건 아닐까. 그는 인터뷰에서 "연주가로 나는 먼저 예술적 완성을 지향하고 다음에 인간적 완성을 위해 노력한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 이런 언급에서 동양선비 기질도 엿보인다.

졸탄 코다이(Zoltan Kodaly.1882~1967)의 '무반주 첼로 소나타'는 슈타커의 분신처럼 그가 연주회마다 거의 빠트리지 않고 연주하는 곡이다. 그가 15세 때 작곡가 앞에서 직접 연주를 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가 헝가리 민속음악을 세계음악으로 승화시킨 작곡가에 대한 경외심을 늘 잊지 않았다는 증거일 것이다. 미국의 첼리스트이자 저술가로도 활약한 조이스 기팅(Joyce Geeting)은 슈타커를 모델로 쓴 '첼리스트들의 왕'이란 책에서 '탁월한 첼로 연주가로 그리고 겸손하고 따뜻한 인간으로 슈타커는 자신의 우상'임을 고백하고 있다. 기예의 승부에 집착하는 연주 세계에서 이건 흔한 일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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