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향기] 검은 성모와 경주 할매 부처
정영목/번역가
특별한 날이라 긴 줄을 서겠거니 하고 찾아갔지만 의외로 쉽게 만날 수 있었다. 가까이서 바라본 검은 성모의 아름다움은 그런 것들을 아랑곳하지 않음에 있는 듯하다. 누구와 마주하든 늘 그 사람보다 몇 치 앞을 더 내다보고 한 길 더 깊은 곳을 들여다볼 듯한 얼굴. 실제로 이 성모상은 지혜의 보좌에 앉은 것이라 한다.
경주 남산에는 고등학교 시절 교련복 차림으로 우울하게 며칠을 보냈던 화랑교육원 근처에 부처의 골짜기가 있다. 정겹기 짝이 없는 탑곡의 마애불들을 어루만지다 마지막으로 동쪽 기슭에 있는 이 골짜기의 주인을 찾아 터벅터벅 걸어간다. 올해 10월 3일 개천절이었다.
몇 십 분을 올라가 대숲이 끝나는 곳이 오른쪽으로 열리면 아담한 크기의 바위 안에서 그 주인을 만날 수 있다. 그러나 주인이라기보다는 주인집에서 허드렛일이나 거들 것 같은 아낙네다. 이 부처 때문에 이 골짜기에 불곡이라는 이름이 붙었고 부처에게는 마애 여래좌상이라는 버젓한 직함도 있지만 아무리 봐도 할매 부처라는 별명이 훨씬 잘 어울린다.
사실 할매 부처는 수많은 팬을 거느린 존재지만 미처 모르고 있다가 전날 산 너머에서 어느 스님의 해설을 귀동냥한 뒤 찾아 나서게 되었다. 스님 말에 따르면 마애불은 바위에 부처를 새긴 것이 아니라 이미 바위 안에 있던 부처를 드러내 편안해 보인다.
그러나 얼굴은 수심에 잠긴 듯하다. 아니면 저 푸근한 얼굴에 감도는 것은 엷은 미소일까. 옆에는 자그마한 바위 둔덕이 있어 그곳에 올라 부처를 위에서 내려다볼 수도 있다. 위에서 볼 때면 남산에서 제일 늙은 이 부처가 얼핏 수줍은 동정녀로 보인다. 그래서인지 1미터 가까운 깊이의 바위 속 그늘에서 좀처럼 빛에 몸을 드러내지 않는다. 그러다가 동지 때, 해가 가장 낮게 내려앉았을 때, 딱 한 번 그 빛을 온몸으로 받는다.
며칠 뒤 동지가 오면 누군가 어떤 간절한 마음에 할매 부처의 몸에 해가 들어차는 순간을 기다리며 바위 둔덕을 어슬렁거릴지도 모르겠다. 그 며칠 뒤 성탄이 오면 어떤 나그네가 검은 성모를 만나 감히 그녀의 손을 어루만지며 굳게 마음을 다져먹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 세상이 일 년에 한 번 크게 저무는 이 시기에 도시 한가운데 있을 수밖에 없는 사람은 멀리 있기에 오히려 두 여성에게 동시에 기원하는 특권을 누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세상이 다시 눈을 뜰 때는 부디 푸근한 공감의 지혜가 곳곳에서 전환의 계기를 만들어 내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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