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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In] 풍요와 궁상이 교차한 '남해 취재기'

정 구 현/경제부 차장

모텔에서 속옷을 빨았다.

'집 떠난 고생이다', 밤마다 모텔 욕실에서 빨래를 하면서 투덜거렸다.

장기 출장이었다. 한국에서 거의 한 달간 12개 지자체를 다녔다. 창간 40주년 특집 '내 고향을 가다' 시리즈 취재차였다. 경상남북도를 돌아 제주까지 이동거리 2000km가 넘는 먼 길이었다.

길이 멀수록 배낭은 가볍다. 노트북과 취재수첩, 카메라, 세면도구를 넣고나면 남는 공간은 가난하다. 이번에도 '두벌 신사'였다.



단출한 배낭의 논리는 단순하다. 오늘 빨래를 안 하면 내일 입을 옷은 없다. 매일 밤 파김치가 되어 모텔방에 돌아와도, 손가락 두마디만한 숙박업소용 비누를 문지르다 부러져도, 수도꼭지가 고장나도, 냉수만 나와도, 빨래는 해야한다.

밤 빨래는 궁상맞지만 낮 여정은 풍성했다. 다닌 곳은 모두 살아 움직여서 아름다웠고, 먹음직했다.

아름다움은 제각각이었다. 첫 방문지였던 경상북도 최북단도시 영주는 향이 좋다. 낯선 도시는 '풍기 인삼'으로 더 친숙했다. 인삼 시장이 내뿜는 수십만 뿌리의 건강한 향을 맡았다.

탈춤축제가 한창이었던 안동에서는 밤새 춤꾼들의 난장에 휩쓸렸다. 춤꾼들에게 탈의 정의는 내가 알던 것과 정반대다. '탈을 쓰면 가식을 벗을 수 있다'고 했다. 정치인들에게 안동의 탈을 선물하고 싶었다.

구미는 더이상 공단도시가 아니었다. 친환경 정책 덕분에 가는 곳마다 공원이고, 가로수였다.

수학여행을 갔던 경주에서 내 나라에 대한 무지를 절감했다. 해설가가 말하는 간단한 상식 문제 하나 답하지 못했다. 첨성대 내부 절반이 흙으로 채워져 있는 건 요즘 초등학생들도 다 안단다.

포항 죽도시장에서는 갓 잡은 생선처럼 펄떡 뛰는 삶들을 만났다. 경남 첫 방문지인 진주에선 남강변의 유등을 바라보면서 안내해준 시 공무원들과 늦도록 막걸리를 마셨다. 소설 '토지'의 무대인 하동의 악양들판에선 섬진강과 지리산을 한번에 볼 수 있었다.

통영은 떠나기 싫은 도시였다. 미륵산 정상에서 본 뿌려진 섬들은 멍게의 비린 맛처럼 멀고도 가까웠다. 거제에서 섬으로 가는 길, 절경들이 출렁였다.

김해 봉화마을도 갔다. 전 대통령의 묘역이 아니라 고교 동창 부친의 묘지여서 가슴 아팠다. 합천의 해인사는 사찰을 넘어 하나의 세력이라는 것도 알게됐다. 제주에선 일곱 시간 비바람을 뚫고 제주 한라산 정상에도 올랐다.

한국에 다녀온 뒤 지방 출장을 갔었다는 말에 되돌아온 질문은 한결같았다. "왜 한국 지방 기사를 미국에서 써?"였다. 그럴 때 마다 단어 하나를 바꿔 설명했다. '지방'을 '고향'으로.

고향의 그리움은 갈 수 없기 때문이다. 대구에서 짬을 내 만난 친구의 말이 잊혀지지 않는다. 30년 만이었다. 코흘리개들은 마흔중반의 아저씨로 마주 앉아 소주잔을 기울였다. 그 친구는 "어릴 때 TV에 나온 이산가족 상봉 안있나. 우리가 뭐가 다르노?"했다. 친구에게는 내 존재 자체가 올해의 뉴스였다.

물리적 거리에 비싼 항공료, 짊어진 삶이 귀성길을 막는 '보통 한인'들에게 고향의 그리움은 더 절실하다.

요즘 언론들의 주요뉴스는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게 하는 '땅콩 회항'으로 꽉 차있다. 그런데, 어떤 이들에게는 고향에서 삶아먹던 땅콩 맛이 더 듣고 싶은 소식일 수 있다.

지금까지 9개 도시를 썼고 세편이 남았다. 반응은 좋다. 고향 소식에 독자들은 반가워했다. 한 광고주는 경남 도시들의 지면 광고를 미리 계약하겠다고도 했다.

나고 자란 땅과 맛과 기억이 그리운 때다. 기사에 대한 호응과 지적이 또 등을 떠민다.

아무래도 또 모텔에서 속옷을 빨아야 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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