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쿠오모 전 주지사, 외곽 보로 보살핀 드블라지오 롤모델

서민 보호 소송으로 명성
1983년 취임 후 세 차례 연임
주민 삶의 질 개선에 주력

'진보주의의 인도자.'

뉴욕타임스는 2일자 부고 기사에서 1일 타계한 마리오 쿠오모 전 뉴욕주지사를 이렇게 묘사했다.

그만큼 쿠오모 전 주지사는 서민 친화적인 진보 정치 성향으로 뚜렷이 각인돼 있다. 또 퀸즈를 비롯한 외곽 보로에 많은 관심을 가졌던 점에서 빌 드블라지오 현 뉴욕시장의 롤모델로 꼽히기도 한다.

그를 규정하는 또 하나의 이미지는 탁월한 웅변가다.



초선 주지사 시절이던 1984년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기조연설을 통해 공화당 로널드 레이건 대통령의 정책을 신랄히 비판했던 것은 유명하다. 당시 '언덕 위의 빛나는 도시'라는 문구로 성과를 내세우던 레이건 대통령을 향해 찰스 디킨슨의 소설 제목인 '두 도시 이야기(A Tale of Two Cities)'라는 연설을 통해 소외된 서민과 빈부격차 심화를 지적한 것.

이 연설로 일약 전국구 스타에 오른 쿠오모 전 주지사는 88년과 92년 대통령 선거에서 잇달아 민주당 후보 선두주자로 각광을 받으며 출마를 권유받았으나 끝내 고사했다.

충분히 가능했던 대통령 후보직과 연방대법원 판사직을 거부하고 뉴욕주지사로서 뉴욕주민들의 삶의 질 개선을 위해 노력했던 그에게는 '허드슨의 햄릿'이라는 또 하나의 별명이 붙여졌다.

83년부터 94년까지 세 차례에 걸쳐 뉴욕주지사를 역임했던 그는 94년 선거에서 더딘 뉴욕주 경제회복을 집중 공격한 공화당의 조지 파타키 후보에게 패배해 4선에 실패한 후 정계를 은퇴했다.

1932년 퀸즈 브라이어우드의 이탈리아 이민자 가정에서 태어난 쿠오모 전 주지사는 PS50 초등학교와 세인트존스 예비학교 세인트존스 대학을 졸업했다. 학창 시절 야구선수로 활약했던 그는 대학 재학 중이던 52년 미 프로야구(MLB) 피츠버그 파이어리츠와 2000달러를 받고 외야수로 계약하기도 했다.

마이너리그에서 야구선수로 뛰던 중 공에 맞아 불의의 부상을 당한 그는 다시 세인트존스 대학으로 돌아와 학부와 법대를 졸업했다.

그가 대중적인 명성을 얻게 된 것은 60년대와 70년대 초 잇달아 퀸즈의 서민 주택 소유주를 대변해 개발업자들과 소송을 진행하면서다.

77년에 출마한 뉴욕시장 선거에서는 에드 카치 연방하원의원과 민주당 예비선거 결선투표까지 가는 접전을 펼친 끝에 석패했다.

하지만 78년 부지사 선거에서 승리한 후 82년 캐리 주지사의 불출마로 공석이 된 뉴욕주지사 선거에 출마해 민주당 예비선거에서 에드 카치 뉴욕시장에게 설욕하는 데 성공했으며 본선거에서 공화당의 루이스 레흐만 후보에게 승리해 마침내 뉴욕주지사가 됐다.

1954년 결혼 후 60년을 해후한 부인 마틸다와 사이에 5남매를 뒀는데 앤드류 쿠오모 현 뉴욕주지사와 CNN의 유명 앵커 크리스 쿠오모 등 두 아들과 마리아.마가렛.마들레인 등 세 딸이 있다.

박기수 기자

kspark206@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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