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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업] 60년이 지나도 동생에게 못한 말

수잔 정/소아정신과 전문의

부모님이 읍내로 세배 가신 어느 새해 첫날이었다. 아홉살된 나는 두살 아래 동생 인숙이를 보며 집에 있었다. 그런데 부모님이 떠나신 지 얼마 안 돼 동생은 배가 아프다고 방에 누워있겠다며 꼼짝하지 않았다. 대문 밖에서 친구들과 놀던 나는 미안해서 물어보았다.

"언니는 나가서 놀아도 돼?"

"응."

아프면서도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동생의 대답에 나는 다시 뛰어 나갔다. 점심 때가 되어 들어와보니 동생은 여전히 누워 있었다.



평소에 좋아하던 사과를 가져다 주니 "언니가 먹어"라며 작은 소리로 말했다. 그리고는 머뭇거리고 있는 나에게 "언니는 나가서 놀아!"라는 반가운 말을 한다. 다시 나갔던 나는 저녁이 돼서야 들어왔다. 그때 집에 돌아오신 부모님은 택시를 불러서 동생을 병원으로 데리고 가셨다. 떠난 차가 남긴 먼지 속에서 나는 멍하게 서 있었다.

다음날 아침 잠에서 깬 나에게 엄마는 동생 인숙이가 하늘 나라로 갔다고 말씀하셨다. 맹장이 파열돼 수술을 받던 동생은 다시는 눈을 뜨지 못했다. 수술 도중 전기가 끊어져 지연됐기 때문이다. 그후 지난 60여년간 나는 동생의 마지막 얼굴을 잊은 적이 없다. 그토록 아팠을 터인데도 신음소리 하나없이 바싹 마른 입술로 "언니, 나가서 놀아"라며 희미하게 웃던 그 얼굴을.

평안남도 태생의 부모님들이 한살짜리 나를 데리고 피란오신 이남땅, 우리 식구는 충남 예산을 새로운 가호적지로 택했다. 그리고 예산에서 동생을 잃었다. 우리 가족은 명절 때는 물론 햇볕이 따스한 아름다운 날에는 동생의 무덤을 찾았다. 그 때마다 아픈 동생을 놓아둔 채 밖에 나가 놀았던 죄책감으로 나는 괴로웠다. '아프다고 왜 말하지 않았어'를 되뇌이며.

내가 4년간 일반 정신과 과정을 마치고 다시 소아 정신과 전문의 수련을 2년 더 받게 된 데에는 일생 동안 나를 짓눌렀던 동생에 대한 죄책감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내가 보는 어린 환자들 중에는 인숙이처럼 고통을 참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이 경우는 배가 아픈 대신에 마음이 아픈 경우이다. 오늘 아침에 본 7세의 남자 아이처럼.

소년의 어버지는 1년 전에 멕시코로 추방당했다. 엄마가 바쁘게 일해야만 생활이 유지됐다. 소년의 성적이 갑자기 떨어지자 엄마는 아들을 데리고 왔다.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아빠가 떠나버린 후, 소년은 자기자신을 미워했단다. '내가 아빠 말을 조금만 더 잘들었더라면…' '내가 동생과 싸우지만 않았더라면…' 아빠가 떠나지 않았을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어린이들은 두뇌기능이 미숙해 원인과 결과를 유추하는 능력이 떨어진다. 아버지가 떠난 것이 이민문제 때문이라고 해도 '내가 나쁜 아이라 아빠가 떠났어'라고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한다. 게다가 이 소년은 남편을 보내고 슬픔에 잠긴 엄마를 더 힘들게 할까봐, 감정표현을 못한 채 참다가 우울증상이 심해지고 성적도 떨어지게 됐다.

"엄마는 어른이니까 네가 말하는 것을 들어 주실 수 있어. 엄마랑 함께 아빠 이야기를 하면 마음이 조금은 풀리지 않겠니? 엄마가 바쁘면 선생님이나 상담가, 목사님과 이야기를 해도 되고. 우리의 느낌을 말이나 글로 나타내면, 그냥 마음 속에 둘 때보다 도움을 받기가 쉽거든.'

혼자서 아픔을 참고 있다가 가버린 내 동생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이다. 그러나 60년이 지나도 나는 그말을 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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