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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종민 칼럼] 갑을 관계, 소유냐 존재냐?

애틀랜타 성결교회 목사

지난 연말 ‘땅콩 회항’사건으로 온 국민이 분노했다.

모두 다 TV를 보면서 ‘이럴 수는 없는’ 일 이라고 혀를 끌끌 찼다. 그러나 화를 가라앉히고 잘 생각해 보면, 이 사건은 희대의 갑질 사건이 아니라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그럴 수도 있는’ 사건이 아닌가?

백화점에서, 주차장에서, 식당에서 서비스에 만족하지 못하고 고성을 내지르는 모습은 하루에도 몇 번씩 마주칠 수 있는 일상이다. 다른 것이라고는 비행기 일등석이라고 하는 좀 특별한 장소에서 일어났다는 것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모든 사람들의 한결 같은 분노를 산 것은 말 그대로 갑질을 견디다 못한 을들의 반란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현상이 계속 생기는 이면을 보면, 우리 나라가 수평적 민주 사회가 아니라 여전히 전근대적 수직적 사회의 잔재 아래에 있음을 보여 주는 것이다.



우리 나라의 갑을 관계는 수직적 계층구조의 변화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다. 수평적 사회에서 직급이 올라 간다는 것은 권한과 책임이 확대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수직적 사회에서는 그 사람 자체의 신분이 올라가는 것이다.

신분이 다르다는 것은 더 이상 평등하지 않다는 말이다. 직장에서 쉽게 사용하는 ‘부하직원’이라는 말 자체가 이런 생각의 산물이다. 상사는 자연스럽게 직원을 하대할 수 있는 권리가 주어진 것으로 여기며, 부하직원은 업무뿐만 아니라 인격적으로도 상사에게 복종해야 한다. 예전에는 신분이 혈통의 문제였다면 이제는 자본의 문제이다.

우리는 민주주의 사회에서 살 뿐만 아니라 자본주의, 시장 경제를 근간으로 살아간다. 돈이 권력이 되고, 자본이 법에도 없는 계층을 형성한다.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되며 세대를 너머 대물림 된다. 이 유리 천장을 깨뜨리기는 점점 더 어려워지며 그 벽은 더욱 두터워진다.

신분을 구분하는 수단이 전근대 사회처럼 법으로 정해져 있지 않다 보니, 이제는 ‘ 혈통’이 아니라 ‘돈’으로 그 신분의 차이를 스스로 드러내야 한다. 그래서 타고 다니는 자동차, 들고 있는 가방, 사는 집으로 그것을 과시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것을 소유의 힘으로 분명히 보여 주었는데도, 그것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들에게는 분노할 수 밖에 없다. 백화점에서 한 시간에 700만원을 쓰는 V.I.P.는 주차를 잘못한 몰상식한 아줌마로는 절대로 보일 수 없고, 내가 주인이라는 생각이 있는 항공사의 부사장은 업무와 상관없이 비행기 안에서도 승객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런 계층 갈등의 심화는 언어의 생활의 변화를 가져오기도 한다. 요즘 난데 없이 나타난 ‘사물존칭’이 그것이다. ‘커피 나오셨습니다, 얼마 이십니다’와 같은 말이 틀렸다는 것은 말하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다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해괴한 말이 널리 사용되는 것은 생각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해야 자신이 무시 당하지 않고 존중받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이런 유리 벽에 갇힌 사람들은 그 계층 안에서 또 새로운 갑을 관계를 형성한다. 인간 정신의 고귀함이 돈보다 중요하다고 가르치는 인문학은 공고하게 마련된 자본주의 신분사회를 부정하는 것이기에 용납되지 않는다.

그나마 가르치는 고매한 민주주의의 가치와 인간의 기본권은 사화 구조를 변화시키기는 커녕 등록금의 벽조차 넘을 수는 없다. 교문 안이나 밖이나 돈이 지배하는 계층구조와 맞닥뜨리게 된다.

말 그대로 존재와 소유의 충돌이다. 그러기에 엄청난 돈을 쏟아 부어 고등교육을 받아도 남는 것이라고는 억울하면 출세해라, 이를 악물고 돈 벌어라 하는 것뿐이다.

그렇다고 우리 사회가 극단으로 치닫고 절망의 벼랑 끝에 있는 것만은 아니다. 갑을 문제가 지금 이렇게 심각하게 드러나고 있다는 것은 이제서야 비로소 문제를 제대로 인식하고 해결책을 찾기 위한 사회적인 협의의 장이 열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시작은 늘 암울하다. 왜냐하면 그 동안 외면해 왔던, 아니 동경해 왔던 현실을 직시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문제 인식은 분노와 체념을 넘어서 새로운 변화를 찾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

역시 고전은 고전인가 보다. 갑을관계에 신음하는 한국사회가 이제는 20세기의 책장에서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를 꺼내서 다시 한번 곱씹어 읽어보아야 할 때가 아닌가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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