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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장교는 병사들이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

[영웅 김영옥]〈52> 프렌치 리비에라③

신병에게 전선 맡기고 장교는 후방에서 편히 있다고 호통
일체감이 없을 때 병사들 목숨 걸고 전투 임하지 않아
매주 한번씩 전선 시찰 다니며 병사 훈련에도 힘써


프로닝과 함께 돌아온 영옥은 다른 장교들 앞에 섰다.

"지금 같은 일이 다시 있어선 안 된다. 모든 장교는 병사들이 있는 곳에 있어야 한다. 전투경험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신병들에게 전선을 맡기고 고참이나 장교들은 후방에서 편히 지내다니 정신이 나가도 보통 나간 게 아니다. 병사는 자기와 함께 고통을 나누지 않는 장교의 말은 듣지 않는다는 것을 모르나? 장교나 사병이나 보솔레이유나 망똥에 갈 수는 있지만 반드시 비상계획에 따라 정해진 비율의 소수만 갈 수 있다. 그러나 누구도 거기서 밤을 지샐 수 없다. 반드시 돌아와야 한다."

프랑스-이탈리아 국경을 경계로 미군은 프랑스에 독일군은 이탈리아에 주둔하고 있지만 두 진영 사이에는 산이 있어 서로 1마일 이상 떨어졌고 이 지역의 독일군은 이미 방어적 전투만 수행할 뿐이었다. 미군이 먼저 공격하지 않는 한 임박한 위험은 없었고 미군 역시 그럴 계획이 없었다. 그렇지만 아직 독일군은 언제라도 날카로운 이빨을 다시 드러낼 수 있는 맹수였다.



장병들이 실로 오랜만의 평화를 즐기고 있었다. 이 같은 장병들의 분위기는 프렌치 리에비라에서 자신들의 임무를 두고 스스로 붙였던 '샴페인 캠페인'(Champagne Campaign)이라는 별명에서도 엿보였다. 직역하면 '샴페인 전투'라는 뜻으로 술과 여자와 싸우는 전선이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아직도 전쟁은 계속되고 있었고 긴장을 푸는 것은 괜찮았으나 정도가 지나치면 문제였다. 영옥이 전선의 병사들을 하나도 빼지 않고 만난 것은 나름대로 신념이 있었기 때문이다.

병사들은 자기 생명이 누구 손에 맡겨져 있는지 알아야 했고 자기가 맡은 작은 임무를 충실히 수행함으로써 전체가 승리를 얻는다는 것을 인식해야 했다. 병사들은 자기에게 명령을 내리는 장교가 자기들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것을 알고 믿어야 했다. 소대장이나 중대장이 자기 병사들이 눈 덮인 참호에서 밤을 지새우기 바란다면 그도 그렇게 할 수 있어야 했다. 병사들 옆에서 병사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는 것이 중요했다. 전장의 병사들은 눈으로 보는 것을 믿기 때문이었다. 일체감은 사기의 생명이었다. 일체감이 없을 때 병사들은 목숨을 걸고 전투에 임하지 않았다. 이 점에서는 100대대나 442연대는 운이 좋은 편이었다. 이들은 대부분 일본계로만 구성돼 고향의 가족들까지 서로 알고 지내는 경우가 많았는데 이런 것들은 근본적으로 서로를 끈끈히 묶어 일체감을 만들어냈다. 이후로도 영옥은 프렌치 리비에라를 떠날 때까지 매주 한 번씩 전선시찰을 다녔다.

영옥은 병사들의 훈련에도 많은 에너지를 쏟았다. 부대는 프랑스 전선에서 또 다시 숱한 사상자가 발생함에 따라 약 1200명의 장교와 신병을 새로 받았다. 연대가 한꺼번에 이 정도 규모를 새로 받는다는 것은 부대를 다시 만드는 것이나 다름없었는데 이들 다수가 100대대 몫이었다. 새로 온 장교나 신병들은 미국 본토 여기저기 산재된 훈련소에서 훈련을 받고 왔는데 훈련소 교관들은 대부분 실제 전장을 몰랐다. 이들에 대한 훈련은 예비대로 있던 A중대에 맡겼다.

영옥이 대대장을 대신해 부대를 맡아 분주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어느 날 대대장이 영옥을 불렀다. 연대가 다시 북프랑스 전선으로 복귀할 것이라는 소문이 떠돌고 있을 때였다.

"영 우리끼리 얘긴데 나는 조만간 부대를 떠날 것이다. 내가 떠나면 맥킨지 소령이 대대장이 될 텐데 글쎄… 어떨지 모르겠다. 맥킨지 소령은 너에 대한 감정이 나쁘다. 아주 피곤하게 될 거야. 거기다 연대장도 바뀔 거야. 부연대장인 밀러 중령이 새 연대장이 될 텐데 밀러 중령도 너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사람 아니냐…"

"…."

"지금 휴가를 간다면 당연히 30일이겠지. 집이 로스앤젤레스라고 했으니 거기까지 가려면 2~3개월은 걸릴 거고 거기서 1개월 휴가를 보낸 다음 다시 부대로 돌아오려면 또 2~3개월은 걸리겠지? 그러니 6개월쯤 여기서 떠나 있을 수 있다. 그 6개월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아무도 몰라. 전쟁이 끝날 수도 있단 말이지. 일단 휴가를 가는 것이 좋겠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프랑스에서 미국을 다녀오는데 그렇게 많은 시간이 걸렸던 이유는 트럭 열차 군함 등 모든 수송편이 전선으로 가는 군인이나 물자에 우선 배정되고 휴가자는 수송편 이용의 우선순위가 제일 낮기 때문이었다.

영옥이 미국으로 휴가를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된 연대장이 영옥을 다시 불렀다.

"영 휴가를 간다고? 네가 원한다면 여기 계속 있을 수 있다. 네가 휴가를 가지 않고 여기 남기로 결정한다면 소령으로 진급시켜 주겠다."

그러나 영옥은 싱글스 대대장의 충고를 받아들여 휴가를 가기로 했다.

이 일이 있은 지 며칠 후 연대장 펜스 대령은 442연대를 떠나 영국으로 갔고 부연대장인 밀러 중령이 연대장이 됐다. 그런데 다른 사람이 걱정했던 것과는 달리 그는 아주 유능한 연대장이 됐다. 인간은 어느 집단에서 2인자로 있으면서 궁극적 책임을 지지 않아도 될 때와 총책임자가 돼 궁극적 책임을 져야 할 때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이는 경우가 많은데 그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실 밀러 연대장은 그 때 영옥을 소령으로 진급시켜 대대장으로 임명할 생각이었다. 오랜 세월이 흐른 후 밀러 연대장이 예편해 민간인으로 샌프란시스코를 방문했을 때 영옥이 샌프란시스코 인근 프레시디오에서 근무 중이라는 말을 듣고 일부러 영옥을 만나러 와 저녁을 함께 하면서 털어놔 영옥도 이 같은 사정을 알게 됐다.

영옥은 2월 22일 프렌치 리비에라를 떠났다. 작년에 아이다가 아프다는 이야기를 듣고 폭격기를 얻어 타고 서둘러 런던으로 날아갈 때와는 달리 이번에는 마르세이유에서 며칠을 기다리다 간신히 트럭 한 자리를 얻어 타고 파리까지 갔다가 거기서 또 며칠을 기다려 간신히 르아브르까지 가는 굼벵이 같은 여행이었다.

르아브르 항구에서 영국으로 가는 군함에 몸을 싣자 이탈리아와 프랑스 전선이 주마등처럼 스쳐갔다. 이탈리아에 상륙한 것이 재작년 9월이었으니 유럽 전선에서 싸운 지도 벌써 1년5개월이었다. 저승의 문턱까지 갔다가 돌아온 순간도 많았고 눈앞에서 죽어간 전우도 많았다. 특히 다케바와 클라우디가 떠나던 모습은 앞으로도 영원히 잊지 못할 것이었다. 형제 보다 진한 우정을 나눴던 사카에 다카하시도 부상을 입고 먼저 미국으로 돌아갔다. 이제 그들은 가고 자신은 미국을 떠난 후 처음으로 장기휴가를 얻어 어머니에게 돌아가는 길이었다.

뱃길은 연합군의 노르망디 상륙작전 항로를 거꾸로 가는 것이었다. 연합군은 포츠머스 앞바다에서 출발해 영불해협을 건너 프랑스 노르망디로 침공해 2차대전의 승패를 분명히 가르기 시작했고 이제 독일군의 패배는 시간문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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