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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독광부와 간호사 출신 부부 인터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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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중앙일보] 입력 2015/02/07 13:31 수정 2015/02/13 08:52

“갱도 무너져 동료 숨져” “가족 부양위해 두 번 독일 근무”
“지하 400M 막장…가족 생각하며 희망을 캤어요”

1970년대 파독광부·간호사 출신 우리역사문화미주교육원 이문형 원장과 임경숙 부부가 파독 당시 생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1970년대 파독광부·간호사 출신 우리역사문화미주교육원 이문형 원장과 임경숙 부부가 파독 당시 생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영화 ‘국제시장’의 열기가 뜨겁다. 6.25 전쟁, 파독 광부, 월남전 파병 등 격변의 역사를 한 개인의 삶을 통해 투영한 이 영화는 수많은 부모님 세대의 공감을 이끌어내며 연일 매진 사례를 기록중이다. 영화 속, 가족을 위해 파독 광부를 자원한 덕수와 역시 파독간호사 영희, 그 둘의 삶을 똑 닮은 이문형(72) 우리역사문화미주교육원장과 임경숙(67) 부부를 만났다. 1970년 파독광부, 간호사로 만난 부부는 자녀들의 권유로 영화관을 찾았다고 했다. 40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떠난 부부는 영화를 보는 내내 참 많은 눈물을 흘렸다며 말문을 열었다.

이문형씨가 배치된 곳은 도르트문트 지역의 ‘카스트로라우셀’ 탄광이었다. 파독 광부의 삶은 고됐다. 지하 400미터 화씨 100도(섭씨 약 40도). 바람 한 점 통하지 않는 그 곳에선 숨 쉬는 것 조차 일이었지만, 이미 닳아버린 당신 옷을 다시 기우고 계실 어머니를 생각하며 버텼다. 야속하게도 공부 잘 하는 막내 동생을 위해 버텼다. 다들 그랬다. 이씨는 “나도 나름 사정이 있었지만 동료들에 비하면 그나마 나았어. 다들 내 가족 먹여살리겠다는 사명 하나로 그 위험천만한 일을 몇 년씩 해냈다”고 말했다.

로마의 올림픽 경기장 앞에서 이문형·임경숙 부부가 데이트를 즐기고 있다.

로마의 올림픽 경기장 앞에서 이문형·임경숙 부부가 데이트를 즐기고 있다.

작업 환경은 녹록치 않았다. 지옥이 존재한다면 이런 모습일까 싶었다. 키가 큰 편이던 이씨는 힘이 셀 것 같다는 이유 하나로 일이 가장 고된 막장에 배치돼 하루 종일 갱도를 뚫었다. 배꼽까지 들어올리기도 힘든 무게의 쇠 실린더로 천반(갱도나 채굴 현장의 천장)을 받히고, 갱도를 넓혀가는 직업이었다. “한참 일하다가 점심으로 싸간 샌드위치를 먹으면 빵에 새까맣게 입 자국이 남았어. 머리부터 발 끝까지 석탄 가루를 뒤집어 쓰니까 근무가 끝나고 같이 승강기 타고 올라오면 친군데도 못 알아보는거야. 목소리 들으면 그제서야 “너 누구 아니냐”하고 부여잡고 눈물 흘리는거지.”

천반 붕괴 사고로 먼저 떠나보낸 동료를 회상하던 이씨는 40년 세월이 무색할 만큼 바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같은 기숙사 건넛방에 사는 동생이었어. 형, 형 하면서 정말 잘 따르던 녀석이었는데….” 위험천만한 순간은 이씨에게도 찾아왔다. 천반이 무너지기 일보직전, 동료의 다급한 외침으로 구사일생한 것. 붕괴 직전엔 항상 램프에 밀가루 같은 가루가 보였다. 돌맹이가 가끔 하나씩 뚝뚝 떨어지는 건 괜찮았지만, 하얀 가루가 보이는 날엔 예외 없이 사고가 났다. “나도 뭐 1~2초 사이로 살아났지. “문형아 나온나!” 소리에 뛰쳐나오고 바로 천반이 그 자리를 덮쳤으니까.”

그래도 희망은 있었다. 생사가 오가는 고된 작업이 매일 반복됐지만 청춘 남녀가 모인 곳에는 사랑이 피어났다. 독일로 넘어간 첫 해, 이씨는 파독 간호사들과 연합한 8.15 광복 파티에서 지금의 아내 임경숙씨를 만났다. 임씨 또한 1970년 고국을 떠나 독일로 파견된 간호사였다. 첫 눈에 서로에게 빠진 둘은 만난 지 2달만에 약혼식을 올리고, 1년 후 동료 광부와 간호사들의 지켜보는 가운데 화촉을 밝혔다. 생존을 건 독일로의 파견이 이뤄진 10여년 간 수많은 커플들이 탄생했다. 가족을 위해,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젊은 청춘들에게 서로는 유일하게 주어진 선물이었다.

임경숙씨는 1970년 부산의 한 병원에서 일하던 당시 동료 간호사들을 따라 파독을 자원했다. 파독 간호사로서 임씨의 하루 일과는 식사 준비, 침대 시트 갈기, 물 떠다주기 등 주로 환자 돌보기로 채워졌다. 독일 하겐 지역의 ‘알게마이네스 크랑켄 하우스’ 병원의 VIP 병동으로 배치됐기 때문에 영화처럼 시체 닦기 작업 등은 하지 않았지만, 가끔 돌보던 환자들이 세상을 떠나면 그 시신을 수습하는 일은 있었다. 그는 독일 사람들을 대체적으로 착하고 배려심 있는 사람들로 기억했다. “파견 당시 가져갈 수 있었던 돈이 미국 돈 10 달러 정도였는데 처음에 병원 관계자들이 가불을 해주곤 했다”며 “쉽지 않은 생활이었지만 병원 측에서 독일어 교육도 시켜주고, 여러모로 잘 챙겨줬기 때문에 2번이나 파독 간호사로 자원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씨 부부는 현재 버지니아주에 정착해 살고 있다. 1975년 임씨에 이어 이씨는 1976년 독일로 2차 파견을 갔으며 1978년 도미했다.

힘 없던 나라에 태어나 타국에서 고생하며 청춘을 보낸 게 억울하지는 않냐는 질문에 부부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아내 임씨는 “물론 고된 시간들이었지만 그 시대엔 그 누구도 쉬운 삶을 사는 사람이 없었다”며 되려 “지금 회상해보면 오히려 많은 경험을 하고, 후세들이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든 감사한 시간들”이라고 말했다.

유현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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