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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파독광부·간호사 출신 우리역사문화미주교육원 이문형 원장과 임경숙 부부가 파독 당시 생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이문형씨가 배치된 곳은 도르트문트 지역의 ‘카스트로라우셀’ 탄광이었다. 파독 광부의 삶은 고됐다. 지하 400미터 화씨 100도(섭씨 약 40도). 바람 한 점 통하지 않는 그 곳에선 숨 쉬는 것 조차 일이었지만, 이미 닳아버린 당신 옷을 다시 기우고 계실 어머니를 생각하며 버텼다. 야속하게도 공부 잘 하는 막내 동생을 위해 버텼다. 다들 그랬다. 이씨는 “나도 나름 사정이 있었지만 동료들에 비하면 그나마 나았어. 다들 내 가족 먹여살리겠다는 사명 하나로 그 위험천만한 일을 몇 년씩 해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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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의 올림픽 경기장 앞에서 이문형·임경숙 부부가 데이트를 즐기고 있다. |
천반 붕괴 사고로 먼저 떠나보낸 동료를 회상하던 이씨는 40년 세월이 무색할 만큼 바로 눈시울을 붉히기도 했다. “같은 기숙사 건넛방에 사는 동생이었어. 형, 형 하면서 정말 잘 따르던 녀석이었는데….” 위험천만한 순간은 이씨에게도 찾아왔다. 천반이 무너지기 일보직전, 동료의 다급한 외침으로 구사일생한 것. 붕괴 직전엔 항상 램프에 밀가루 같은 가루가 보였다. 돌맹이가 가끔 하나씩 뚝뚝 떨어지는 건 괜찮았지만, 하얀 가루가 보이는 날엔 예외 없이 사고가 났다. “나도 뭐 1~2초 사이로 살아났지. “문형아 나온나!” 소리에 뛰쳐나오고 바로 천반이 그 자리를 덮쳤으니까.”
그래도 희망은 있었다. 생사가 오가는 고된 작업이 매일 반복됐지만 청춘 남녀가 모인 곳에는 사랑이 피어났다. 독일로 넘어간 첫 해, 이씨는 파독 간호사들과 연합한 8.15 광복 파티에서 지금의 아내 임경숙씨를 만났다. 임씨 또한 1970년 고국을 떠나 독일로 파견된 간호사였다. 첫 눈에 서로에게 빠진 둘은 만난 지 2달만에 약혼식을 올리고, 1년 후 동료 광부와 간호사들의 지켜보는 가운데 화촉을 밝혔다. 생존을 건 독일로의 파견이 이뤄진 10여년 간 수많은 커플들이 탄생했다. 가족을 위해, 나라를 위해 자신을 희생한 젊은 청춘들에게 서로는 유일하게 주어진 선물이었다.
임경숙씨는 1970년 부산의 한 병원에서 일하던 당시 동료 간호사들을 따라 파독을 자원했다. 파독 간호사로서 임씨의 하루 일과는 식사 준비, 침대 시트 갈기, 물 떠다주기 등 주로 환자 돌보기로 채워졌다. 독일 하겐 지역의 ‘알게마이네스 크랑켄 하우스’ 병원의 VIP 병동으로 배치됐기 때문에 영화처럼 시체 닦기 작업 등은 하지 않았지만, 가끔 돌보던 환자들이 세상을 떠나면 그 시신을 수습하는 일은 있었다. 그는 독일 사람들을 대체적으로 착하고 배려심 있는 사람들로 기억했다. “파견 당시 가져갈 수 있었던 돈이 미국 돈 10 달러 정도였는데 처음에 병원 관계자들이 가불을 해주곤 했다”며 “쉽지 않은 생활이었지만 병원 측에서 독일어 교육도 시켜주고, 여러모로 잘 챙겨줬기 때문에 2번이나 파독 간호사로 자원할 수 있었다”고 회상했다. 이씨 부부는 현재 버지니아주에 정착해 살고 있다. 1975년 임씨에 이어 이씨는 1976년 독일로 2차 파견을 갔으며 1978년 도미했다.
힘 없던 나라에 태어나 타국에서 고생하며 청춘을 보낸 게 억울하지는 않냐는 질문에 부부는 “그렇지 않다”고 대답했다. 아내 임씨는 “물론 고된 시간들이었지만 그 시대엔 그 누구도 쉬운 삶을 사는 사람이 없었다”며 되려 “지금 회상해보면 오히려 많은 경험을 하고, 후세들이 잘 자랄 수 있는 환경을 만든 감사한 시간들”이라고 말했다.
유현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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