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정신건강에세이] 무솔리니의 몰락

무솔리니가 수상으로 집권하자 산업이 부흥했다. 건축업이 활성화되어 도시에는 새 건물들이 들어서고 항만이 수리되며 강폭은 넓어지고 수심이 깊어졌다. 곳곳에 댐도 만들었다. 수출이 늘었다. 많은 이탈리아 사람들은 행복해 했다. 특히 부자들은. 그러나 가난한 사람들은 더 가난해졌다.

무솔리니는 자신이 이탈리아의 구원자로 생각했다. 키가 작은 ‘두체’(수상)의 초상화나 조각이 사방에 세워졌다. 학생들은 교실마다 장식한 환한 웃음을 짓는 그의 초상화 앞에 수직으로 서서 활기 있게 경례했다. 대중 모임에서 군중들은 그 이름을 열창했다. 캐톨릭 교회와도 좋은 관계를 수립했다. 이탈리아 인들 만이 아니라 전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무솔리니를 구원자로 생각했다.

사람들이 몰랐던 것은 무솔리니의 심리가 매우 불안정하다는 점이었다. 그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이익을 우선시키는 에고이스트였다. 그는 국가나 민족에 대한 충성심이 전혀 없었다. 독재자로 처음 한 것은 반대자들을 척결하는 일이었다. 청년 파시스트들인 ‘검은 셔츠’단을 정규군으로 편입시키고 이들을 비밀 조직으로 양성했다. 그리고는 적이나 자기에게 충성하지 않는 자들을 무자비하고 야만적으로 제거했다. 그 결과에 대해 두체는 매우 만족해했다. “인민들은 내가 이런 인간쓰레기들을 청소한 것을 감사해야 한다. 두체는 언제나 옳다.”

히틀러가 등장한 후 이들은 1934년 베니스에서 처음으로 만났다. 이탈리아는 당시 아직도 유럽에서 유력한 제국으로 알려졌기 때문에 그는 파시스트 제복으로 차려입고 뻐기고 들어섰다. 히틀러는 아직 평복을 입었다. 무솔리니는 히틀러의 반 유태인 정책을 비난했다. 무솔리니는 이탈리아 인도 열등민족이냐고 물었다. 히틀러 왈 “물론이지. 아랍, 희랍, 터기 족들과 마찬가지로. 모두들 니그로의 피가 혈관에 흐르고 있으니까.” 원래 무솔리니는 동족 이탈리아 사람들이 나태하고 기백이 없는 민족이라고 생각했었다. “우리에게는 북 유럽 민족의 피가 필요하단 말이야.” 그가 이탈리아 인들의 낙천성을 볼 때마다 하던 소리였다. 무솔리니는 히틀러와 더 이상 논쟁을 계속하지 못했다.



이들 독재자들은 제국주의적 영토팽창을 원했다. 1935년 이탈리아 군은 에티오피아로 진주했다. ‘에티오피안’ 야만인들을 물리친 다음 세계 정복의 길에 나선 것이다. 전격적인 승리를 원했지만 원정군은 진창 밭에서 전진을 못하고 활이나 창으로 무장된 원주민들의 공격을 받아 진퇴양난에 처해 있었다. 한 이탈리아 장군이 에티오피아의 수도 아디스아바바에 진격하기 까지 아프리카 원정군은 유럽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말았다.

2차 대전이 터지자 무솔리니는 히틀러 편에 섰다. 그러나 이탈리아군은 전쟁에 약했다. 그리스에서 이탈리아 군은 패전을 거듭했다. 북아프리카 전선에서도 이탈리아 군은 독일 군에 짐만 되어 그들이 패배할 때마다 독일군은 달려가 구해주는 역할만 했다. 독일 군 장성들은 무솔리니는 물론 이탈리아 지휘관들이나 군대자체를 경멸했다. 1942년, 그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지쳤다. 매독은 다시 그를 괴롭혔다. 게다가 아메바 성 설사와 궤양이 악화되었다. 전쟁은 절망적이고 히틀러에게는 멸시를 받고 또 배우지도 못한 전략을 수립하다보니 기능을 상실했다. 그는 미국과 연맹한다는 꿈, 자신이 반 유태인이 되어 기독교를 폐지하려는 꿈, 교회는 교황과 사제들을 통해 자신을 박해해왔다는 망상. 이 과대망상증 환자는 편집장애자로 변한 것이다.

그의 행동변화를 알게 된 정부는 1943년 두체의 사직을 요구했다. 그의 사직은 받아들여졌고 군통수권은 왕에게 돌아갔다. 즉시 그는 정부에 의해 구속되었다. 정부가 그를 연합국에 넘긴다는 소식을 듣자 그는 자살을 기도했다.

한편 히틀러는 사라진 무솔리니를 찾았다. 그가 연합군에게 사로잡히면 방대한 군사비밀이 노출되기 때문이었다. 나치스 친위대는 북부 이탈리아에서 그를 구출했다. 건강으로 인해 사양했지만 결국 히틀러의 강권에 의해 ‘이탈리아 사회주의 공화국’을 선포했다. 그를 따르는 사람은 얼마 없었다. 그는 1933년부터 사귀던 정부 클라레타와 함께 히틀러가 붙여준 몇 명의 독일 군과 함께 도망 생활을 계속했다. 당시 북부 이탈리아에는 파르티잔, 독일 군, 골수 파시스트 대원들 간에 서로 어울려 전투가 벌어졌다.

결국 그는 파르티잔에게 포로가 되었다. 그들은 독일 군복으로 가장한 무솔리니를 즉시 알아보고 사형에 처했다. 사람들이 더 잘 보기 위해 그와 정부 클라레타의 시체는 다리에 노끈으로 묶여 거꾸로 매달렸다.


정유석 (정신과 전문의)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