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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픈 업] 엄마의 전쟁 이야기

수잔 정/소아정신과 전문의

"아주머니, 그 아기 울지않게 하세요. 만일에 아이 울음 소리가 들리면 우리 모두가 죽습니다." 19살의 엄마가 한 살된 나를 데리고 이남으로 피란 올 때의 이야기다. 칠흑같이 어두운 밤, 쪽배를 타고서 황해도를 벗어나, 인천으로 몰래오는 데 만일 사람 소리가 들리면 무조건 공산군의 총알이 날아오는 형편이었단다. 다행히 내가 자 주는 바람에 쪽배 안의 가족들은 물론 이제 88세가 되신 어머니와 나도 살 수 있었다.

육지에 다다른 사공이 실수로 엄마를 내려놓은 곳은 한 길이 넘는 바다였다. 나를 업은 채로 물에 빠지는 것을 본 어느 젊은이가 뛰어들어 건져내지 않았더라면 우리는 간신히 이남에 도착해서 생명을 잃었을 것이라며 엄마는 고마워하셨다. 그리고 독실한 기독교 신자가 되셔서 그동안 받은 은혜를 주위에 갚고 계신다.

이남에 와서 공무원으로 일하는 아버지 직장 때문에 우리 가족은 끝없이 이사를 다녔다. 황해도 연백에서 유치원을, 인천 동명초등학교에서 1학년을, 목포 유달초등학교에서 2학년을, 그리고 3학년 때 시작한 충남 예산의 금호초등학교에서 3년을 다닌 후 졸업을 했다. 그러기에 예산은 내 마음의 고향이다.

나에게는 아기적 사진이 한 장도 없다. 이사가 잦았던 초등학교 때 사진도 거의 없다. 그러나 내게는 문득 문득 떠오르는 마음 속 장면이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엄마와 함께 버선발로 산등성이를 뛰어 올라가는데 산밑에 있던 공산군이 우리를 향해 총을 쏘는 장면이다.



다른 하나는 모든 움직임이 정지된 논둑에 서서 해질녁 엄마와 함께 올려다 본 하늘이다. 공주에 있는 피란민 수용소에 있을 때일 거란다. 수용소에서 쌀 배급은 받았지만, 부식이 없어 농가에 나가 된장을 얻어가지고 돌아오는 길이었을 거라고 말씀하신다.

나의 부모님은 35년 전 내가 미 육군 군의관으로 일하던 워싱턴주로 이민을 오셨다. 1년의 반은 비가 내리는 곳이다. 셋이나 되는 아이를 기르는데 좀 도와달라는 나의 간절한 요청 때문이었다. 어머니 덕분에 아이들은 모두 독립했고 3년 전에 90세로 아버지는 세상을 뜨셨다.

전쟁으로 너무 큰 마음의 상처를 받으셨는지 아버지는 엄마에게 피란 얘기나 북한 사람 이야기는 꺼내지 못하게 하셨다. 그러나 아버지가 가신 후로는 자주 옛날 이야기를 부탁드린다. 어머니의 기억 속에 살아 있는 어린 아이, 나를 찾아내기 위해서다.

나를 임신한 후 분만을 하러 친정에 가셨던 어머니가 심술을 부렸던 이야기도 해주셨다.

엄마에게 미안하게도 갓 태어난 나는 예쁘지가 않았었나 보다. 막내이던 엄마의 손위 언니가 데리고 온 아기가 워낙 예뻐서 온 가족이 거기에만 모여 있었단다. 속이 상한 엄마는 "나 이제 집에 갈래!" 소리지르며 나를 업고서 분연히 일어서셨단다. 사태를 짐작했던 오라버니가 간신히 달래 주어서 발길을 돌렸지만 친정 식구들이 많이 놀랐었단다. 우리 엄마 만세! 엄마랑 나랑 만세 부르며, 웃었지만 아름답던 그 이모는 피란을 못오셔서 그 후에 생사를 모른다며 목이 메이셨다.

이제 자유로운 몸이 되신 어머니는 노인학교에 다니며 요가랑 다른 운동을 열심히 하신다. 빙고 시간에는 잽싼 산수 능력 때문인지 1등을 많이 하셔서 상으로 받은 휴지를 차곡차곡 모으셨다가 손자, 손녀들이 오면 한 보따리씩 선물로 나눠 주신다. 아직도 우리 네 형제보다 머리가 좋으신 엄마, 오래 오래 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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