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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사 산책] 한국 감리회 첫 선교사는 스크랜턴

옥성득 교수 / UCLA 한국기독교학

올해 부활절은 130년 전 1885년 4월 5일 부활절에 언더우드와 아펜젤러가 제물포에 도착한 날과 겹친다. 지금까지 한국감리교회는 그 날을 기준으로 아펜젤러를 첫 선교사로 기념해 왔다. 그러나 임명일과 함께 임명지인 서울 도착일과 선교사역 개시일을 기준으로 하면 스크랜턴이 첫 선교사가 된다.

개신교의 경우 한국(서울)에 거주하는 정식 선교사로 임명된 날짜는 북장로회의 경우 헤론(1884년 4월 28일)-앨런(7월 22일자 전보)-언더우드(1884년 7월 28일) 순이며, 북감리회는 스크랜턴(1884년 10월 4일)ㅡ아펜젤러(1885년 1월) 순이다. 이들의 서울 도착일은 앨런(1884년 9월 22일), 언더우드(1885년 4월 5일), 스크랜턴 (1885년 5월 6일), 헤론(6월 21일), 아펜젤러(1885년 7월 29일) 순이다.

아펜젤러는 4월 5일 제물포에 상륙했으나 갑신정변 이후 정세 불안 때문에 임신한 아내를 데리고 서울에 들어갈 수 없어 나가사키로 되돌아갔다가 마침내 7월 말에 입경했다. 그 전에 파송된 스크랜턴이 5월 6일 홀로 서울에 들어갔으며, 그 가족과 어머니도 6월 20일 제물포에 도착한 후 바로 입경했다. 스크랜턴은 정부병원인 제중원에서 일하다가 6월에 헤론이 도착하자, 7월 초부터 정동에서 독자적인 의료 사업을 함으로써 감리회 선교를 시작했다.

부산이나 제물포 도착이 선교사의 내한 기점이 될 수 없는 것은 그 항구들이 경유지이기 때문이다. 이들은 서울에 임명되었으므로 서울 도착일을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 감리회 첫 선교사는 스크랜턴으로 하고, 감리회 첫 한국교회는 1887년 10월에 세워진 정동제일교회로 해야 한다.



그러나 그가 '잊혀진 선교사'가 된 것은 1905년부터 해리스 감독이 한국감리회를 관할하면서 친일 정책에 불만을 품은 스크랜턴이 선교사직을 사임했기 때문이다. 1902년 아펜젤러 순직 후 정동제일교회는 그를 길이 추앙했다.

그러나 스크랜턴의 시병원은 사라졌고 상동교회도 미약했으며 그의 자녀도 선교사로 근무하지 않았기에, 스크랜턴은 1922년 일본 고베에서 쓸쓸히 죽었고, 그를 기억하는 자가 없었다. 늦었지만 한국과 한국인을 사랑했던 스크랜턴을 기억하고 그를 감리회의 첫 선교사로 복권할 때이다.

sungoak@hot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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