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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turday] 학벌·인맥 사회의 그늘 … 타인 사칭 메신저 판친다

[세상 속으로] 늘어가는 ‘사이버 리플리 증후군’
인터넷·SNS서 다른 사람 행세
거짓말을 진실로 믿고 대리만족
연예인이 주요 표적, 일반인도 늘어

새벽 2시. SNS 메신저 알림이 깜빡인다. ‘언니 하이.’ 절친 대학 후배 A다. 반가운 마음에 채팅 창을 열고 대화를 시작한다. ‘A야 잘 지내지? ^^’ 돌아온 대답은 졸음을 싹 가시게 한다. ‘언니 남편은 잘 지내?’ 이건 뭐지. 기분이 이상하다. 마음을 추스르고 대화를 이어간다. ‘네 형부 잘 있지~’ ‘나 언니 남편 꼬시고 싶다. 실은 우리 침대에서….’ 이건 아니다. 절친 후배도 남편도 의심해 본 적이 없다. 그럴 리 없어. 정신 줄을 놓으면 안 된다. ‘너 미쳤어? 내가 알던 A 맞니?’ ‘그럼 맞지. 언니 남편 지금 나랑 있어.’ 등줄기를 타고 흐르던 땀이 식는다. 다행이다. 남편은 내 옆에서 잠들어 있다. 다급히 A에게 전화를 건다. 비몽사몽 전화를 받는 A의 목소리에 안도와 함께 공포가 몰려온다. “A야, SNS에서 누군가 네 행세를 하고 있어.”

 파장은 컸다. A의 주변인 대부분이 SNS 속 ‘가짜 A’에게 속아 넘어갔다. 음담패설뿐만 아니라 “친구 B가 외국인 남자친구랑 만나다 임신을 해 낙태를 했다” “유부녀 C가 돈 많은 남자와 바람이 났다”는 등의 악성 루머가 퍼져 있었다.

 ‘프로파일 스쿼팅(Profile Squatting)’. 인터넷·SNS 공간에서 타인을 사칭하는 행위를 뜻한다. 타인의 정체성을 도용해 자신의 것인 양 표현하는 것이다. 주로 연예인들이 표적이 돼 왔다. 가해자들은 SNS 대문에 연예인 사진을 걸어두고 그들인 것처럼 흉내를 내며 사람들의 반응에 대리 만족을 느낀다. 문근영·소녀시대·박신혜·엄지원 등 사생활 공개가 많고 신상정보 검색이 쉬운 연예인과 유명인들이 프로파일 스쿼팅 고통에 신음했다.

 피해자는 연예인에 한정되지 않는다. A씨와 같은 일반인의 피해도 크게 늘고 있다. 경찰 사이버수사팀 관계자는 “50대 여성이 젊은 여성의 사진을 도용해 어린 남성들에게 말을 걸고 관심을 끌다가 만나자고 하면 갑자기 자취를 감춰 수사 의뢰가 들어온 적도 있었다”며 “젊은 여대생들이 소위 잘나가는 사람을 사칭하는 사례가 가장 많다”고 했다. 한국인터넷진흥원에 따르면 인터넷 이용자 10명 가운데 3명(30.1%)이 개인정보 침해를 경험했다. 본지가 입수한 경찰청의 2014년 정보통신망침해범죄 가운데 계정 도용 사례는 567건으로 집계됐다. 그러나 검거율은 22.9%(130건)에 그친다. 그나마도 구속된 사람은 3명에 불과하다. A씨도 경찰에 수사를 의뢰했지만 “해외 SNS 사이트라 수사가 쉽지 않다”며 “재산상 피해가 없고 현행법상 근거가 없어 처벌이 어려우니 민사로 손해배상을 청구하는 게 낫다”는 답변을 들었다고 했다.



 실제로 ‘온라인상 타인 사칭’ 자체를 처벌할 수 있는 법은 없다. 단순히 개인정보를 SNS에 공개하거나 다른 사람으로 속이는 것은 처벌 대상이 아니기 때문이다. 숭실대 이상현(국제법무학) 교수는 “타인을 사칭하면서 훔친 신상정보를 퍼뜨리는 것은 사생활 침해, 금융사기나 명예훼손 등 2차 피해로 이어질 가능성도 있다”며 “인터넷 실명제가 위헌 결정으로 폐지되면서 모욕·명예훼손·강요죄는 미수범을 처벌할 수 없다. 타인 사칭을 제재할 수 있는 법안이 최근 발의된 만큼 대책 마련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형사처벌 외에 정보통신망법상의 게시 중단 제도를 이용할 수도 있다. 그러나 게시 중단 제도를 일반인이 이용할 땐 포털 등의 협조를 구해야 한다. 이를 위해선 증거 수집과 엄격한 본인 확인 절차를 거쳐야 한다. 법무법인 민후의 김경환 변호사는 “게시 중단 제도가 복잡해 포털 등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피해자들이 지쳐 중간에 그만두는 경우가 많다”며 “2차 피해가 발생하지 않은 상태에선 손해배상의 구체적 액수 산정도 어려워 사실상 조치를 취할 방법이 거의 없는 것이나 다름없다 ”고 말했다.

 프로파일 스쿼팅 가해자들은 온라인의 익명성 뒤에 숨어 타인의 삶을 훔친다. 그들 중 일부는 허구의 세계(타인의 인생)를 진실이라 믿고 거짓된 말과 행동을 반복한다.

 전문가들은 이런 증상이 심해지면 인격장애가 될 수 있다고 진단한다. 현대인의 새로운 마음의 병, ‘사이버 리플리 증후군(Cyber Ripley Syndrome)’이다. 리플리 증후군의 거짓말은 스스로를 위해 만들어진다. 자신을 거짓말 속에 가두고 그 세상을 지키기 위해 몸부림친다. 리플리 증후군이란 용어는 미국 소설가 퍼트리샤 하이스미스의 『재능 있는 리플리씨(The Talented Mr. Ripley)』(1955)라는 소설에서 유래했다. 소설의 주인공 ‘리플리’는 거짓말을 현실로 믿은 채 환상 속에서 살아간다. 이 증후군은 성취욕구가 강한 무능력한 개인이 마음속으로 강렬하게 원하는 것을 현실에서 이룰 수 없는 사회구조적 문제에 직면했을 때 자주 발생한다. 자신의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열등감과 피해의식에 시달리다 상습적으로 반복적인 거짓말을 일삼으며 이를 진실로 믿고 행동한다. 연예인이나 타인에 대한 동경에서 시작해 SNS에서 그들의 삶을 훔치는 순간 쏟아지는 사람들의 호감과 관심에 만족을 느끼면서 걷잡을 수 없이 거짓말의 세계로 빠져드는 것이다. 심리학 박사인 최창호씨는 “사이버 리플리 증후군은 사회가 발전하고 인간관계가 소원해진 가운데 자신의 존재감을 찾으려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병폐”라며 “온라인상에선 얼굴을 모르는 타인을 사칭하면 죄책감이 덜하다. 결국 자신도 그 거짓말을 진심으로 믿게 되고, 그 거짓말을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 크고 작은 피해가 생겨 범죄로 이어질 수 있다”고 경고했다.

곽재민 기자 jmkwak@joongang.co.kr

[S BOX] “성취욕 큰데 실현 기회 없을 때 빈번히 발생”

리플리 증후군은 일종의 망상장애다. 리플리 증후군이 있는 사람에겐 거짓말 탐지기도 통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이 사는 현실을 가짜라고 믿고, 마음속 깊이 꿈꾸는 세계나 변신하고 싶은 사람을 진짜 자신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치료가 어렵다. 치료에 오랜 시간이 걸리는 데다 완치 여부도 불분명하다. 리플리 증후군 진단을 받은 환자는 심리 상담과 약물 치료를 병행하며 치료를 받는다. 지난해엔 리플리 증후군이 있는 20대 남성이 48개 대학에서 신입생 행세를 한 사건이 알려지면서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다.

 리플리 증후군은 영화의 단골 소재이기도 하다. ‘달콤 살벌한 연인’, 알랭 들롱이 주연을 맡은 프랑스 영화 ‘태양은 가득히’와 이를 리메이크 한 앤서니 밍겔라 감독의 ‘리플리’ 등이 대표적이다. 이 영화들은 리플리 증후군에 빠진 주인공을 통해 인간 내면에 감춰진 거짓된 욕망을 그린 공통점이 있다. 우종민 서울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는 “개인의 사회적 성취욕은 큰 데 비해 꿈을 실현할 수 있는 기회가 제한된 경우 리플리 증후군은 더 빈번히 발생한다”며 “능력보다는 학벌과 인맥 등 사람의 ‘겉장’을 중요시하는 우리 사회에서 이 같은 현상이 더 두드러지는 이유”라고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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