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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건강에세이] 밴 고흐의 ‘감람나무’ 그림들

가난한 개신교 목사의 아들로 태어난 네덜란드의 화가 빈센트 빌렘 반 고흐(1853-1890)가 젊은 날 한 때 성직자의 길을 택하려 했던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는 유화만 해도 9백 점을 그렸지만 생전에 대가를 받고 판 것은 단 한 점뿐이었다. 그래도 화가로 생계를 유지했던 것은 동생 테오가 정신적으로나 재정적으로 지속적으로 지원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1876년 11월, 23세인 빈센트는 동생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내가 연단에 섰을 때 어두운 지하실로부터 누군가가 올라와 한 줄기 광명이 되었다. 그것은 기이한 경험이었고 따라서 나는 지금부터 어디를 가든지 복음을 전파할 것이다.” 하나님의 부름을 받은 것으로 확신한 것이다. 그가 영국 한 지방 웨슬리 감리교회에서 평신도 전도자로 주일날 설교를 부탁받은 직후였다.

평소 우울한 편이었는데 이날 설교 주제는 슬픔과 위로, 이에 따른 환희였다. 이는 고흐의 일생을 관통한 주제가 되었다. 그가 사랑했던 성경 속의 인물과 구절은 구약에서 남들에게 멸시와 구박을 당해 애통하면서도 그들의 고통을 짊어지고 대속하는 이사야 선지자 (“여호와께서 그로 상함을 받게 하시기를 원하사 질고를 당케 하셨은 즉 그 영혼을 속건 제물로 드리기에 이르면 그가 그 씨를 보게 되며..또 그의 손으로 여호와의 뜻을 성취하리로다.” 이사야서 53:10), 그리고 신약에서는 근심 속에서도 항상 기뻐하는 바울 사도(“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고린도 후서 6:10)였다. 그러고 보면 고흐는 자신을 고난과 의문 속에서도 계속 복음을 전파한 인간적인 예수와 동일시한 것 같다.

다음해 그는 신학 공부를 하기 위해 암스테르담으로 갔으나 곧 포기하고 평신도 사역자의 길로 나섰다. 그러나 지나친 종교적 열성과 자기식 대로만 주장하는 타애주의로 인해 교회에서 배척을 받아 전도사로 실패했다.



한편 아버지와의 갈등도 심화되었다. 그는 아버지를 사랑했지만 아버지의 믿음은 독단적인 교리만 내세우는 위선이라고 보았다. “아버지는 나를 이해하지 못하며 동감하지도 않는다. 나는 아버지의 믿음에 동의할 수 없다. 그의 믿음은 나를 억압하고 질식시킨다. 나도 마찬가지로 같은 성경을 읽는데.” 신은 성경 말고도 자연과 인간을 창조함을 통해 자신을 보인다고 생각했다. 인간 중 에서도 가장 가난하고 약한 자들을 통해.

결국 그는 미술가가 되기로 작정했다. “그림을 통해 나는 어떤 위로를 받는다. 마치 음악이 우리에게 주는 것과 같이.”

화가로 정진하면서 우여곡절 끝에 정신병으로 인해 귀를 자르는 기행을 저질렀다. 결국 그는 1899년 5월 휴식을 취하기 위해 생 레미 드 프로방스에 있는 한 정신병원에 자원해 입원했다. 여기서 그는 많은 명작들을 그렸다.

병원 근처에는 오래된 감람나무들이 무성했다. 그해 6월, ‘산맥을 배경으로 한 감람나무들’이란 작품을 완성시켰다. 동생에게 이 그림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고통 중에 기도하는 예수에게 천사가 나타나 위로해 주는 기분을 준다고 적었다. 그는 예수의 이미지나 종교적 표현을 그림으로 나타내지 않아도 색채와 과장된 그림으로 관중의 마음을 달래는 효과가 있다고 보았다. 당시 그는 종교적인 그림을 그린 베르나르라는 화가에게 “겟세마네란 역사적 동산을 직접 그리지 않아도 예수의 고통을 표현할 수 있고 산상보훈에 인물을 그리지 않아도 온유하고 위로하는 모티브를 살릴 수 있소.”라고 비판했다.

푸른 하늘에 구름이 나르고 살아 움직이는 듯 한 산들에 둘러싸여 있으며 온통 몸통이 뒤틀린 오래된 감람나무들은 땅에 바짝 들러붙어 목숨을 유지하려고 싸우는 것 같다.

그해 12월에는 “감람나무 동산”이란 그림을 완성시켰는데 이 그림에서는 올리브를 수확하는 시골 아낙네들의 모습도 보인다.(고흐는 생전에 감람나무란 주제로 18개의 작품을 그렸다.) 자연의 법칙에 따라 일정 기간 휴식을 한 다음 열매를 맺고 후에 결과를 걷어드리는 ‘수확’은 자신의 ‘재생’을 표현한 것 같다.

그러나 그 ‘재생’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이 그림을 완성시킨 후 반년 만에 그는 권총으로 가슴을 쏘아 자살한 것이다.


정유석(정신과 전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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