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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오디세이] '천의 목소리' 성우 배한성

여심 사로잡는 특유의 비음… 대한민국 원조 '심쿵'

입사때 당시 신파조 톤과 안맞아
제대로 된 배역 한번 못맡아

1970년대 청년문화와 목소리 궁합
외화 더빙 열풍에 주인공 싹쓸이

제임스 딘 .맥가이버. 가제트…
지금까지 맡은 배역 2만명 넘어



지금은 스타 강사로 특유의 입담
대학. 기업서 러브콜 끊이지 않아

천의 목소리. 식상하다 못해 진부한 표현이지만 어쩌겠는가. 더 이상의 설명은 의미가 없는 것을. 바로 국민성우 배한성(69)씨다.

한국에서 유년시절을 보내고 청년기를 보낸 이들에게 그는 영원한 알 파치노이며 더스틴 호프만이며 로버트 레드포드다. 외화 미니시리즈 '가시나무' 속 랄프 신부의 얼굴은 흐릿하지만 고뇌에 찬 그의 목소리는 여전히 기억 속에 각인돼 있고 무미건조한 리처드 딘 앤더슨의 얼굴에 그의 목소리가 입혀지면서 맥가이버는 우리에게 진짜 첩보원 맥가이버로 부활했다.

로버트 레드포드 역시 그의 비음 섞인 달콤함과 어우러졌을 때에만 비로소 우리는 레드포드를 100% 만나게 되었으니까. 동경의 대상들과 소통할 수 있게 해줬던 그의 목소리는 화려했던, 그리하여 눈부셨던 청춘의 기억 한 조각일 수밖에.

분명 세월 앞 장사 없지만 목소리만은 그 시절 그 노스탤지어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성우 배한성씨를 LA 한인타운에서 만났다. 이번 LA 방문의 '공식적' 목적은 후배 방송인 런칭한 화장품 홍보 때문이었지만 미국 여행 한번 가보고 싶다는 아내의 바람을 들어주고 싶었다는 지나가는 말로 하는 고백이 아마도 '실질적' 목적인 듯싶다.

늦은 오후, 그와의 대화는 맥가이버와 함께 한 듯 유쾌했고 로버트 레드포드와 동행한 듯 달콤, 진지했다.

#뻔하지 않게, 남들과 다르게

워낙 매력적인 목소리의 소유자니 성우 세계에 발 딛자마자 유명세를 탔을 것이라 짐작했다. 그러나 웬걸, 1965년 스물한 살 나이에 KBS 8기 공채 성우로 입사한 그는 특유의 비음과 당시 만연했던 신파조의 성우 톤이 아니라는 이유만으로 제대로 된 배역을 맡지 못했다고 한다.

"당시 제게는 그 성우 톤이 촌스럽게 느껴져서 다른 변화를 시도하고 싶었죠. 일상생활에서 나오는 자연스런 목소리 연기를 하고 싶었어요. 스티브 잡스가 말했던 Think Different를 제가 훨씬 더 앞서 생각했던 거죠(웃음)."

그의 선견지명은 오래지 않아 빛을 발하게 된다. 70년대 들어서면서 청바지와 통기타로 대변되는 청년문화가 확산되면서 한국 방송계에도 젊은 바람이 불기 시작한 것이다.

라디오 작가와 연출자들도 신선한 목소리와 연기를 찾았고 그의 목소리는 그들이 원하는 변화의 바람에 딱 들어맞았다. 그의 약점이라고 여겨졌던 특유의 비음은 당시 라디오 드라마 단골 캐릭터인 고뇌하는 청춘을 연기하는 데 안성맞춤이었고 그런 그의 목소리는 대한민국 여심을 단박에 사로잡았다. 대한민국 원조 '심쿵'(심장을 쿵쿵 뛰게하는)오빠가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천의 목소리, 대한민국을 사로잡다

1970년대 들어서면 부터 외화 더빙열풍이 불기 시작했다. 한창 라디오에서 주가를 올리고 있던 그에게는 황금의 기회가 찾아 온 것. 영화 '보난자'의 막내 역할을 시작으로 제임스 딘 영화, '도망자'의 데이비드 젠슨 등 70년대 할리우드 은막을 빛냈던 청춘 배우의 역할은 모조리 도맡아 연기했다. 그 수많은 영화들 중 기억에 남는 연기는 70년대 말 미국 드라마 야망의 계절에서 연기한 남자 주인공 루디 조다쉬 역. 당시 그의 목소리에 반해 조다쉬와 결혼하고 싶다는 여성들이 줄을 섰고 한 평론가는 그의 연기를 두고 배한성의 비음은 듣는 이로 하여금 전율을 느끼게 한다는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어떤 분야든 디테일이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남들과 다른 1%, 그것이 성공의 열쇠인데 그러기 위해선 부단한 노력이 중요하죠. 한 번의 더빙을 위해 전 영화를 3번 이상은 봅니다. 대본이 나오면 너덜너덜해질 때까지 봐서 동료들이 더럽다고 제건 집어가지도 않았죠(웃음)."

어디 이뿐인가. 그가 단순히 미남 배우의 '잘생긴 목소리'만 연기한 것은 아니다. 그의 연기력을 다시 한 번 인정받게 한 맥가이버와 '아마데우스'의 모차르트는 당시로서는 코믹과 정극을 넘나드는 파격적인 연기여서 그야말로 그의 목소리 안에 천의 얼굴이 있음을 입증하는 계기가 됐다. 이렇게 그가 지금까지 연기한 배역은 약 2만여 명선. 당시 그의 인기는 더 이상 비교불가, 대체 불가가 됐다.

#롱런(Long run)하려면 롱런(Long learn)하라

그는 늘 새로운 도전을 주저하지 않는다. 성우로 출발했지만 80년대 인기 라디오 DJ로도 활약했으며 교통방송의 간판 프로그램 '가로수를 누비며'는 자그마치 17년간 진행을 맡았다. 이뿐 아니다. 80년대 중반부터는 TV방송까지 영역을 확장해 '풍물기행' '퀴즈 올림픽' 등 각종 교양프로그램 MC로도 두각을 나타냈다.

그런가하면 그는 방송가에 소문난 자동차 마니아이기도 하다. 덕분에 꽤 오랫동안 자동차 전문잡지에서 인기 칼럼니스트로 활동하기도 했고 1992년엔 경차 타코와 다마스를 타고 유라시아 횡단이라는 '무모한' 도전에 성공해 세간의 주목을 끌기도 했다. 듣는 이들로 하여금 입이 떡 벌어지게 하는 그의 이 무시무시한 열정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어느 책에서 롱런하려면 롱런하라는 글을 읽은 적이 있는데 그게 제 인생의 모토가 된 것 같아요. 끊임없이 배우고 도전하려고 합니다. 그러다보면 매 순간 최선을 다하게 되고 그렇게 하루하루를 열심히 살다보면 성공은 따라오게 되죠."

그렇듯 그의 열정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이다. 그는 현재 한국에서 스타 강사로서 입지를 다져가고 있다. 그의 남다른 인생철학에 천의 목소리를 입혀 청중을 쥐락펴락하는 그의 강의는 이미 입소문을 타고 기업과 대학 등에서 섭외가 끊이지 않는다. 이번 LA 방문에서도 그는 지난 4일 동국대에서 토크 콘서트를 열어 한인들에게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대화 사이사이 그의 목소리는 로버트 레드포드를 지나 알 파치노에서 다시 로빈 윌리엄스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넘나들었다. 어디 할리우드 스타들 만이었겠는가. 그 길지 않은 시간 버버리 코트 깃을 세운 가제트 형사가 살짝 다녀갔는가 하면 눈 큰 고양이 가필드도 잠시 머물다 갔다.

그의 목소리 끝, 잊고 있었던 젊은 날의 초상이 오버랩 되는 것은 순전히 기분 탓만은 아니었으리라. 아마도 그의 목소리는 바다 건너 먼 곳에서 날아온 수줍은 '내 청춘'의 연애편지이며 시인 유치환이 우체국 창문으로 내다봤을 에메랄드 빛 하늘이다. 그리하여 삭막한 일상에 기어이 안부를 묻고야 마는 청량한 설레임이다. 단언컨대 성우 배한성은 여전히 우리들의 로망이며 영원한 청춘의 아이콘이다.

이주현 객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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