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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태섭 장군이 현충원에 안장되지 못하는 이유는

“전쟁 중 전사한 병사는 흙에 묻혔는데 나는 관에 묻힐 수 없다”

청렴 결백의 상징, 군인 중의 군인
현충원 “5개 훈장 받았어도 시민권자는 안장 안 돼” 논란


1950년대 초 어느 날, 대한민국 육군 창군 주역 중 한 명인 고 원태섭 장군(준장)은 당시 미군사고문단장과 함께 헬리콥터를 타고 서울 상공을 날고 있었다. 이승만 전 대통령의 명령을 받아 국립묘지 부지를 물색하기 위해서였다. 며칠을 둘러보고 여러 날을 고심한 끝에 지금의 국립현충원(옛 동작동 국립묘지) 부지를 선정했다.

그로부터 60여년이 흘러간 지난 4월 14일 원태섭 장군은 예편 후 여생을 마친 시카고에서 향년 96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그러나 정작 원 장군은 현충원에 안장되지 못했다. 태극무공훈장, 을지무공훈장 등에 빛나는 그의 업적도 현충원 안장의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미 시민권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 현충원 측의 설명이었다. 현충원 탄생에 결정적인 기여를 한 원 장군이 정작 자신은 이곳에 안장되지 못한다는 것은 모순이라는 모든 예비역 군인들의 지적이다.

▶대한민국 국군 창군 주역



원태섭 장군은 대한민국 국군 창군의 주역으로 군번이 27번이다.
일본 중앙대학과 미국 캔사스의 참모대학, 그리고 한국 국방대학원을 졸업했다. 재무감과 경리감, 경리학교 교장, 부군단장, 사단장을 역임한 뒤 1961년 예편했다. 예편 후 석탄공사 이사를 거친 뒤 1973년 가족들과 함께 시카고로 이민왔다. 자녀로 두영·재령·성윤씨 등 1남2녀, 사위 임종수 산부인과 의사 등을 두었다.

원씨의 자녀는 부친에 대해 ‘진취적이었고 선구자적인 혜안이 있었던 인물’로 평가하고 있다. 원 장군의 둘째 딸 성윤씨는 “아버지는 지금 시대에서나 거론될 법한 사회적 문제들에 대해 이미 관심을 갖고 계셨었다. 가령 ‘여성들도 가정에만 머물 것이 아니라 능력이 있다면 일을 통해 사회적 기여를 해야 한다’라고 강조하셨다. 즉 당시 한국사회에서는 드물었던 여성주의자(Feminist)와 같은 관점도 갖고 계셨다”며 “그 외 다른 부분에서도 열린 마음과 사고를 갖고 계셨던 분”이라고 회고했다.

▶근면·성실함으로 주목받은 인생

원 장군이 군인으로서 을지무공훈장, 충무무공훈장, 화랑무공훈장, 무공포장 등에 빛나는 성과를 달성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그의 부지런함과 성실, 끈기, 열정 때문이었다.

원 장군이 일본 중앙대학 재학 당시, ‘학구열에 불탔던 원 장군에게 청소부가 아예 도서관의 열쇠를 맡겼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아들 성윤씨는 “아버지가 워낙 일찍 도서관에 나오고, 또 늦게까지 머무르려 하니까 청소부가 아예 도서관 열쇠를 아버지에게 주었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이 이야기는 입소문을 타고 교내에 퍼져 당시 중앙대학의 총장이 아버지를 초청해 식사를 대접했다고 한다”고 말했다.

▶청렴결백함의 상징

원 장군은 청렴결백함의 상징이었다. 그 시절 ‘준장’이라는 위치에 있었다면 어느 정도 부를 축적할 수도 있었겠지만, 원 장군은 있는 재산을 타인들에게 나누어 줄지언정 부정으로 재산을 모으는 법은 없었다. 딸 세령씨는 “어쩌다 돈이 생겨도 다른 사람들을 위해 많이 사용하셨다. 항상 타인의 상황을 헤아리면서 그들을 이해하고 돕기 위해 노력하셨다”라고 회고했다.

원 장군의 지인인 S씨는 “원 장군은 워낙 성품이 강직하고 곧은 사람이었기 때문에 정도에 어긋나는 법이 없었다. 그래서 4.19 군사 혁명 후 정권을 잡은 이들이 원 장군을 물러나게 하려고 흠집내기를 시도한 적이 있다. 그러나 먼지 하나 나오는 것이 없었다”며 “이런 원 장군을 두고 당시 사병들은 ‘군인 중의 군인’이라고 칭송했었다”고 말했다.

▶“원 장군은 반드시 현충원에 안장돼야”

원 장군의 지인 S씨는 원 장군이 반드시 현충원에 안장돼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다.
S씨는 “원 장군의 큰 딸이 한국 현충원을 방문해 원 장군의 안장 문제를 논의했으나 거절당한 것으로 알고 있다. ‘미시민권자’라는 것이 이유였다”며 “현충원 부지 설립에, 한국 전쟁 중 큰 업적을 남긴 원 장군이 국립묘지에 안장될 수 없다는 것은 받아들이기 어렵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어 “원 장군이 이번에 돌아가시기 전 홈디포에서 자재를 구입해 저렴한 관을 만드셨다. ‘전쟁 당시 전사한 병사들은 관도 없이 그냥 흙에 묻혔는데 내가 호화스런 관에 묻힐 순 없다’는 것이 그 분의 생각이셨다. 그처럼 국군에 대한 자부심, 전우애가 강한 분이셨다”며 “원 장군이 반드시 현충원에 안장돼야 한다" 고 밝혔다.

박웅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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