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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In] '이야기'를 담지 못하는 박물관

[LA중앙일보] 발행 2015/07/27 미주판 8면 기사입력 2015/07/26 17:45

정 구 현/사회부 차장

"1944년 8월21일. 오늘밤이 수용소에서 마지막 밤이다. 내일 아침 난 육군에 입대하러 떠난다. 수용소에 온 지 2년 만이다. 처음 여기 온 날을 또렷이 기억한다. 우릴 강제로 실은 기차가 멈췄다. 차창 밖을 내다보니 포모나(LA인근 지역)에서 함께 살던 친구들이 우릴 반겼다.

수천 마일 떨어진 곳에서 친구들을 보니 반가웠지만 다시 집으로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슬퍼졌다.(중략) 내일 아침 일찍 떠난다. 엄마, 아빠, 형제들이 건강하게 지내길 바란다. 다들 알로하(안녕) -다시 글을 쓰게 될 때가 1년 뒤가 될지 그보다 더 빠를지, 10년 뒤가 될지 모르겠지만."

96페이지 분량 일기의 마지막장이다. 일기를 쓴 소년은 LA에서 나고 자란 '닛세이(일본계 2세)' 스탠리 하야미다. 1942년 16세 때 미국정부의 일본인 강제수용 정책에 따라 가족과 함께 와이오밍주의 수용소에 갇혔다. 2년 뒤 그는 육군에 입대해서야 수용소를 떠날 수 있었다. 하지만 가족들에게 다시 글을 보내지 못했다. 마지막 일기를 쓴 지 8개월 뒤인 1945년 4월23일 하야미는 이탈리아에서 전사했다. 꽃다운 19세였다.

하야미의 일기는 LA다운타운 일미박물관 상설전시관에 전시돼 있다. 22일 찾아간 일미박물관에서 만난 코지 사카이 프로그램 담당 부회장은 "10만여 점의 소장품 중 가장 아끼는 유물"이라고 소개했다.

일본계 미국인들은 이 일기를 일본판 '안네 프랑크의 일기'라고까지 부른다. 소년의 시각으로 수용소 내의 희망과 절망 등 당시 강제수용됐던 일본계 미국인 12만여 명의 트라우마가 고스란히 적혀있다.

일미박물관의 상설 전시관에는 하야미의 일기를 비롯해 지난 150여년간 일본계 이민자들이 남긴 '사연'들이 빼곡히 전시돼 있다. 최초의 일본계 미국인 야구단이 쓴 야구공, 최초의 일본계 미국인 사찰에서 쓰던 제기 등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그들만의 이야기들이다. 일본인 1만 명이 집단 거주했던 수용소 전체 축소모형과 수용소 막사도 1/3크기로 재현되어 있다.

첨단 기술로 만들어진 깔끔한 갤러리도 좋지만 투박하더라도 가공되지 않은 축적된 그들만의 이야기가 오래간다는 것을 그들은 알고 있다. 일미박물관은 그 하나하나의 사연들을 마치 천을 짜듯 엮어 그들만의 역사를 재정립하고 있다. 개관 23년이 지났지만 그들의 이민사 정리는 여전히 진행 중이다.

투어를 마치고 커뮤니티룸에서 점심 식사를 함께했다. 마침 이날은 우리로 치면 한인회 격인 '일본인회(Japan Society)' 자원봉사자들이 박물관 전 직원들을 대접하는 날이다. 여름 3개월간 매주 1번씩 '사시미 런치'라는 이름으로 커뮤니티와 직원들이 밥을 먹으면서 1:1로 교감한다. 특별 손님도 초대됐다. 2011년 3월11일 후쿠시마 원전 재해로 부모를 잃은 고아들이다. 당시 고아가 된 아이들은 2000명에 달한다. 2시간여 걸린 일미박물관 투어는 사람들이 남긴 사연과 이를 보존하고, 전달하려는 사람들의 노력을 깨닫는 과정이었다.

21일 한미박물관의 청사진이 공개됐다. 외형상 뚜렷한 한국 전통미는 찾기 힘들다. 설계 도면엔 수장고도 없다. 한 이사는 "골동품 같은 것들은 전시할 필요가 없다"며 수장고가 필요없다고 했다. 아파트를 옆에 붙여지어 '지속적인 수익'을 확보했다는 데만 의미를 찾고 있다.

한미박물관이 반드시 일미박물관처럼 돼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보다 오래된 이민 역사, 주류사회와의 교류, 경제적 위치, 정치적인 영향력 등을 감안하면 그들처럼 박물관을 만들기는 어렵다.

하지만, '역사를 전시하겠다'는 짧은 문장을 감히 말하려면 얼마나 많은 노력과 시간과 정성이 필요한지 정도는 최소한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런 지각조차 없이 박물관을 지을 바에야 차라리 '갤러리형 아파트'라고 방향성을 수정하는 것이 후손들에게 덜 미안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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