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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 참전용사 이중식씨 “귀환 포로와의 포옹 잊을 수 없어”

62주년 한국전 휴전협정일 특별 인터뷰
해병대 출신 한인으로 유일

7월 27일은 한국전 휴전협정 체결일이다. 1953년이니까 62년 전에 한반도에서는 전쟁이 멈췄다.

데스플레인에 거주하고 있는 이중식(미국명 조셉)씨에게도 휴전협정 체결일은 뜻깊다. 이씨는 한국전 참전용사다. 한국군이 아니라 미군으로, 해병대 소속으로 한국 전쟁에 참전한 독특한 이력이 있다. 1930년생으로 올해 85세인 이씨는 서울 만리재감리교회서 목회를 하던 아버지 고 이은택 목사가 시카고로 유학오자 가족과 함께 이민 왔다. 휴전협정일을 앞두고 이씨로부터 한국전 참전 스토리를 들을 수 있었다.

아버지 고 이은택 목사가 개럿신학대로 유학 온 것은 일본의 박해를 피해서였다. 일제의 기독교 탄압으로 인해 모진 고문을 당하던 이 목사를 살리기 위해 교회가 도피시키듯 미국 유학을 보낸 것. 그것이 1935년이었고 가족들은 1940년 시카고에 왔다. 이후 이 목사는 1936년부터 1975년까지 시카고감리교회에서 목회를 했다. 이씨는 레인텍고교를 졸업하고 1950년 일리노이대 어바나-샴페인에 입학했다. 그러다 한국전 발발 소식을 들었고 1952년 초 입대를 결심한다. 이에 대해 이씨는 “당시 대학생들은 징집대상이 아니어서 한국전에 참전하지 않아도 됐다. 하지만 한국이랑은 전혀 상관없는 친구들이 한국전으로 죽거나 부상을 당한 것을 많이 보고 접하면서 죄책감이 들었다. 그래서 해병대에 입대, 한국전에 참전하게 됐다”고 말했다.

9개월간의 기초군사훈련과 후반기교육, 전투교육을 받은 뒤 임진강에서 경계 임무를 보던 이씨는 1953년 초 판문점에서 포로교환 통역을 맡았다.
이씨는 “당시 참전한 미 해병대에 한인은 나밖에 없어서 통역을 하게 됐다. 매일 400명의 한국군, 미군, UN군 포로들이 북쪽에서 왔고 주6일씩 5주간을 일했다. 모두 1만2000명의 포로를 받았는데 그때 경험은 잊을 수가 없다. 내가 이름을 부르면 트럭에서 포로들이 한명씩 내렸는데 자유를 다시 찾은 포로들과 포옹할 때가 잊혀지지 않는다”고 말했다.


3개월간의 판문점 근무를 마치고 부평의 ASCOM이라고 불리는 군수지원시설에서 복무하다 시카고로 돌아왔다. 이후 학교로 돌아가 학업을 마쳤고 부인 이숭옥씨를 만나 1남1녀를 뒀다. 졸업 후에는 일리노이교통국에서 근무하며 소수계우대프로그램 담당자로 4년간 일하기도 했다. 이씨는 올해 베테랑스데이에 열린 데스플레인 기념식에도 자원봉사자로 일했다. 한국전 참전 해병대모임에 참석하곤 했지만 지금은 4명만 생존하면서 모임이 힘들어졌기 때문. 이씨는 “젊은 사람들은 한국전에 대해 잘 모른다. 이런 기회를 통해 한국전을 알릴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말했다.

박춘호 기자 polipch@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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