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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속 뉴스] 잔디가 복수할까 두렵다

김석하/사회부장

# 들어가지 마시오.

팻말 너머로 신세계가 푹신거렸다. 금단의 땅. 그래서 매혹적이었다. 그 초록 위로 스프링클러(당시에는 이름도 몰랐지만)에서 뿜어 나와 흩뿌려지는 물보라에 끌려 안으로 들어갔다가는 "나와, 어서 나와!" 대한민국에서 잔디는 성지였다.

'아, 내가 미국에 진짜 왔구나.' 이민 온 캘리포니아는 온통 잔디였다. 미국의 부유와 여유가 잔디에서 즉각 느껴졌다. 밟아도 됐다. 뜻으로만 배운 자유가 내 발 밑에서 살아 숨쉬고 있었다. 연약하고 부드럽고, 겨우 존재하는 잔디에 투쟁과 고통 때론 죽음과도 맞바꾸는 자유가 있을 줄이야.

# 들어가야 합니다.



미술평론가이자 베스트셀러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를 쓴 유홍준 교수의 말이다. "목조건축의 경우 사람들이 오해를 하고 있는데, 목조건축은 '들어가지 마시오'가 치명적으로 문화재를 망가뜨립니다. 사람이 살지 않으면 천하의 명작도 3년 안에 폐가가 됩니다. 거기에 사람이 살면서 먼지도 쓸어주고, 습기가 차면 문을 열어주고, 추울 때는 불을 때주고 해야 살아나는 것입니다. 들어가지 말라고 해서 망가진 문화재가 수도 없이 많습니다."

식물학자에 따르면 잔디는 적당히 밟아줘야 한다. 누르는 압력이 잔디의 신진대사를 돕는다. 밟는 우리의 발도 마사지를 받는다. 자연과의 즉각적인 교감.

# 더우면 물을 마신다.

엘니뇨 현상에 몬순 기후까지. 덥다. 더우면 물을 마셔야 한다.

잔디는 증산작용으로 물을 뿜어 대기를 식혀준다. 증산작용은 식물체 내의 수분이 수증기로 되어 식물체 밖으로 배출되는 현상이다. 뿌리에서 흡수된 물은 물관을 따라 잎으로 올라오고, 잎에 분포된 기공을 통해 수증기의 형태로 증발된다. 잔디밭이 시원한 이유다. 주변 환경이 시원하면 물을 덜 마신다. 대기를 식히는 잔디가 먹는 물의 양과 더워서 우리가 먹는 물의 양은 누가 더 많을까.

# 죽어도 주지 마라.

가뭄이 캘리포니아를 타들어 가게 했다. 정부는 물 사용 억제를 신신당부했다. 엄격한 절수 규정을 마련하고 어길 시 벌금을 때리겠다고 엄포를 놨다. 그러면서 '죽어도 좋으니' 잔디에 물을 주지 말라고 했다. 갈색이 되도 벌금을 부과하지 않겠다고 했다. 제리 브라운(Brown) 주지사의 명령은 초록의 잔디를 브라운(brown)으로 시들게 하고 있다. 미국의 부유와 여유도 타들어 가고 있다.

초록의 자유만큼은 지키고 싶어서 인조잔디로 위장? 조경 전문가에 따르면 인조잔디는 자체적으로 열을 생성한다. 특히 지하수가 스며드는 것을 막아 오히려 가뭄을 악화시킬 수 있다.

# 긴 가뭄 끝에 긴 물난리.

정부는 잔디를 뒤엎으면 보상금을 주는 정책을 벌이고 있다. 수 개월 사이 그 기금이 바닥날 정도로 잔디 엎기는 인기다.

두렵다. '그깟 잔디'가 아니기 때문이다. 잔디는 자연이면서 자연을 보호하는 일차적 존재다. 잔디의 잔뿌리는 흙이 흩어지는 것과 수분이 증발하는 것을 막아 준다. 나무의 뿌리가 직각으로 서려면 단단한 흙이 필요하고, 뿌리는 습한 토양이 절실하다. 그래서 나무를 심고 난 다음에는 주변에 잔디를 깔아둔다. 잔디가 없어지면 나무가 없어지고 숲이 없어진다.

기상청은 올 겨울 엘니뇨로 많은 비가 내릴 것이라고 예보했다. 비가 오면 잔디없는 땅이 쓸려나가고 무너질 수 있다. 긴 가뭄 끝에 긴 물난리가 뒤따르는 이유다. 산사태가 일어나고 지진의 피해가 커진다. 미아 레어 조경 전문가는 "LA가 마치 유전자 돌연변이를 만들고 있다"고 경고했다.

우리 생존의 기반인 땅을 움켜쥐고 있는 것은 잔디다.

갈색으로 멍든 잔디가 복수할까 두렵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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