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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향계] 표준시 바꾼 북한의 자존심?

[LA중앙일보] 발행 2015/08/11 미주판 8면 기사입력 2015/08/10 19:23

이종호/논설위원

"간악한 일본 제국주의자들은 삼천리 강토를 무참히 짓밟고 전대미문의 조선민족 말살정책을 일삼으면서 우리나라의 표준시간까지 빼앗는 천추에 용서 못할 범죄행위를 감행했다." 북한이 광복 70년을 맞는 15일부터 일본에 맞춰져 있는 현재의 표준시간을 30분 늦추기로 했다. 이에대한 반응들이 복잡하다. 황당하다, 막무가내다라는 비난 속에 통쾌하다, 북한답다, 우리도 바꾸자는 댓글도 적지가 않다.

개인적으론 또 한 방 얻어맞았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미사일 발사, 핵 실험, 금강산 관광 중단, 개성공단 폐쇄, 방문자 억류 등 국제관례와 일반 상식을 뒤엎는 행동으로 세계의 이목을 끌어온 북한이다. 그런데 이번엔 또 느닷없이 표준시간대 변경이라니. 상상도 못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당당할 수 있다는 것이 놀랍다. 어쩔 수 없이 이 눈치 저 눈치 보며 사는 우리와는 차원이 다른 처신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가 없다.

북한이 이렇게 일을 벌일 때마다 들고 나오는 것이 민족 자존심이다. 주체니 자주니 하는 말도 한다. 우리 역사를 돌아보면 이런 식의 자존심 세우기는 북한만의 전매특허는 아니었다. 항상 중국의 위세에 눌려 살던 우리였다. 따라서 조금만 틈이 보이면 나라의 자존심 세우는 일을 도모하곤 했다. 칭제건원(稱帝建元)이 대표적이다.

칭제건원이란 왕을 황제라 칭하고 연호도 독자적인 것을 쓰는 것을 말한다. 과거 한자문화권 안에서 황제는 오직 하나였다. 연도 기록도 중국 황제의 연호를 따서 썼다. 따라서 칭제건원은 중국 중심의 세계질서에 반기를 드는 오기(傲氣)이자 민족 자주의식의 발현이었다.

기록상 우리 역사상 처음 독자적 연호를 사용한 왕은 만주를 휘저었던 고구려 광개토대왕(재위 391~412년)이다. 영락(永樂)이라는 연호를 썼다. 신라 전성기를 구가한 진흥왕(재위 540~576년)도 개국(開國), 대창(大昌), 홍제(鴻濟) 등의 독자 연호를 썼다. 699년 대조영이 건국한 발해는 연호를 천통(天統)이라고 하는 등 처음부터 황제국을 자처했다.

고려 역시 태조 왕건 때부터 천수(天授)라는 독자 연호를 사용했고 4대 광종(재위 949~975년) 때에는 광덕(光德).준풍(峻豊)이라는 독자 연호를 썼다. 모두 나라의 힘이 뒷받침됐던 시대였다.

그렇지 않은 때도 있었다. 19세기말 대한제국이 그랬다. 고종 임금이 '황제'가 됐고 '광무(光武)'라는 독자 연호도 채택했다. 기울어가는 국운을 되살려보려는 나름대로의 몸부림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알아주지 않았다. 결국 13년을 못 채우고 나라는 문을 닫았다. 지금의 북한을 보면 이런 역사가 자꾸 오버랩된다.

같은 민족으로서 민족 자존과 자주의식을 내세우는 북한이 가상할 때도 있다. 그럼에도 치기어린 무모함이란 느낌은 어쩔 수가 없다. 냉수 마시고도 이쑤시개 찾는 우리 민족 특유의 허세를 보는 듯해서다. 이번 표준시 변경도 그렇다. 당장은 후련하고 통쾌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국제사회에서의 실익이나 남북관계의 미래를 생각하면 성급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한때 고려는 거란 100만 대군을 물리칠 정도로 강한 나라였다. 그렇다고 요량없이 마냥 뻗대기만 하지는 않았다. 안으로는 황제국의 조직과 용어를 쓰면서도 대외적으로는 몸을 낮추고 중국 연호를 썼다. 굳이 중국을 자극해 국력을 소모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그때 고려를 줏대없는 비겁한 나라였다고 평가하지 않는다. 조선도 중국에 대해 사대를 표방했지만 그것이 냉엄한 국제질서 속에서 나라와 민족을 지키는 최선의 실리정책이었음은 우리가 다 안다.

이제 서울과 평양은 30분 시차가 생기게 됐다. 분단 70년, 한반도가 통일을 향해 같은 방향으로 함께 달려가도 모자랄 판에 시간마저 두 쪽이 났다는 것이 착잡하다. 광복 70주년, 양식으로 성대히 차려놓은 남한의 축하 잔칫상에 북한으로부터 시큼한 김치 한 보시기 선물받은 느낌이 이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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