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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20/20] 와츠에서 퍼거슨까지 '반복의 역사'

[LA중앙일보] 발행 2015/08/12 미주판 8면 기사입력 2015/08/11 22:21

김완신/논설실장

백인경관의 총격으로 숨진 흑인청년 마이클 브라운의 사망 1주기를 맞아 미주리주 퍼거슨에서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다. 브라운이 사망한 지 1년이 된 9일 밤, 시위대들은 흑백차별 금지와 경찰시스템 개혁을 요구하며 행진을 했다. 1000여명이 참여한 시위로 60여명이 체포됐고 총격이 발생하면서 퍼거슨 전역에 비상사태가 선포됐다. 1년 전 악몽의 재연이다.

지난 해 비무장의 브라운은 도로를 가로질러 가다가 경찰의 제지를 받는 과정에서 최소 6발의 총탄을 맞아 사망했다. 그해 11월 세인트루이스 카운티 대배심이 청년을 사살한 백인경관을 불기소해 전국에 인종차별 시위가 거세게 일어났다.

역사는 되풀이 된다고 한다. 50년 전 어제(11일)는 와츠폭동이 시작된 날이다. 1965년 사우스LA 와츠지역을 운전하던 흑인 마퀘트 프라이는 난폭운전 혐의로 가주 고속도로 순찰대 경관의 검문을 받는다. 경찰이 음주여부를 검사하는 과정에서 운전자와 동승했던 로널드가 경관에게 거칠게 항의했고 조금 후에는 마퀘트 어머니까지 합세했다. 백인경관들이 흑인을 무차별 폭행했고 임신부까지 때렸다는 소문이 퍼져나가면서 사태는 폭동으로 돌변했다. 17일까지 계속된 폭동으로 34명이 숨지고 1000여명이 부상 당했으며 3500명이 체포됐다. 재산피해도 4000만달러에 이르렀다. 와츠지역 46스퀘어마일이 6일간 '전투' 지역으로 선포됐고 1만4000명의 주방위군이 진압에 투입됐다.

난폭운전을 경찰이 단속하는 과정에서 폭동이 불거졌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인종차별에 따른 사우스LA 흑인들의 반감이었다. 와츠폭동뿐 아니라 1992년 LA폭동도 시작은 사우스LA 지역이었다.

2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참전했거나 군수산업에 종사했던 흑인과 라틴계가 LA지역에 대거 몰려오게 된다. 당시 LA는 미국 남부 지역처럼 흑인의 주거지역을 법으로 제한하지는 않았지만 보이지 않는 차별을 가해, 흑인 거주가 허용된 지역이 많지 않았다. 결국 밀려드는 흑인을 주로 와츠와 캄튼이 포함된 LA의 남쪽에 거주하도록 하는 정책을 사용했다. 이 같은 정책을 불법으로 규정한 판결이 나온 1948년 이후에도 한동안 거주지 제한정책은 계속됐다.

1960년대 들어 미국은 경제적 호황을 맞지만 흑인들에게는 먼 이야기였다. 호경기의 혜택은 백인들에게만 돌아갔고 이런 사회적 배경에서 와츠폭동이 발생했다. 폭동의 주요 타겟은 백인 소유 비즈니스였다. 1000여개의 업소와 빌딩이 약탈되거나 불에 탔다. 폭동은 6일 만에 진정됐지만 흑인 민권운동에 힘을 싣는 계기가 됐다.

폭동을 일으킨 흑인들의 불만은 다양했지만 결국은 교육기회의 부족, 백인과의 소득격차가 가장 큰 문제였다. 당시 캘리포니아 주지사였던 팻 브라운도 낮은 교육 기회와 높은 실업률이 폭동의 도화선이었다고 인정했다.

5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흑백 격차는 여전히 갈등의 불씨다. 2012년 연방센서스 자료를 보면 백인 성인의 대학졸업률은 29.3%지만 흑인은 17.7%에 불과하다. 흑인 대학졸업률이 개선되고는 있지만 아직 미미한 수준이다. 소득수준도 변한 것이 없다. 흑인계 소득은 백인계의 60% 정도에 머물고 히스패닉계보다도 적다. 여기에 고학력.고소득의 아시안들이 미국사회에 자리 잡아가면서 상대적 박탈감은 더 커졌다.

스웨덴 학자 칼 폰 린네가 인종을 백인, 흑인, 아시안 등으로 분류했지만 이는 인종간 우열과는 상관이 없다. 다만 인종차별의 근거가 되어 노예제와 서구의 식민지 정당화에 이용됐을 뿐이다. 와츠에서 퍼거슨까지 반세기 민권운동의 역사를 거쳐 왔지만 차별은 남아 있다. 사회와 제도는 개선됐어도 뿌리깊은 정서적 차별은 오랜 시간에도 변함이 없다. 피부색으로 차별 받지 않는, 그런 나라는 아직 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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