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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열 기자의 취재 그 후] 기독교에게 이웃은 어떤 의미일까

[LA중앙일보] 발행 2015/08/18 미주판 22면 기사입력 2015/08/17 18:08

손봉호 교수를 만났습니다.

지난주 종교 면에 실린 인터뷰 기사 잘 보셨습니까.

손 교수는 오늘날 기독교를 향해 "손해볼 줄 아는 힘을 가져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 힘은 기독교 윤리에서 기인합니다.

그는 "남이 '나' 때문에 이익을 보게 하는 것이 기독교 윤리"라고 정의했습니다. 그건 이타(利他)의 정신입니다. 타인에 대한 희생과 사랑 배려를 말합니다.

예수도 말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고 말입니다. 손 교수는 예수의 가르침을 근거로 "신앙이 하나님과의 관계라면 윤리는 이웃과의 관계"라고 했습니다.

그는 한국의 대표적인 윤리 학자입니다. 그래서일까요. 사실 기독교 윤리의 의미를 매우 거창하게 설명할 줄 알았습니다. 하지만 의외로 그는 너무나 간단하고도 쉽게 윤리의 정의와 실천 방안을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조금 허무했느냐고요? 아니요. 인터뷰 내내 오늘날 기독교가 윤리의 개념을 너무 고상하게 여겼던 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어쩌면 오늘날 기독교의 현실이 그만큼 윤리의 기본적인 의미 마저 잃은 게 아닌가 싶어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일부 독자들이 "기독교의 핵심은 윤리가 아니다"라며 반대 의견도 주셨습니다. 네 물론 압니다. 기독교는 윤리가 본질인 종교가 아닙니다. 기독교의 핵심인 '구원'도 바른 윤리의 소유로만 해결될 문제는 아닙니다.

맞습니다. 기독교의 주장대로 인간에겐 죄성도 있습니다. 인간이 윤리적으로 완벽할 수는 없습니다.

혹자는 말합니다. 윤리나 도덕을 강조하는 건 기독교의 '은혜'가 경시되고 '행위'만 부각돼서 위험하다고 말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기독교가 '윤리' 자체를 외면 또는 등한시할 수는 없습니다. 윤리를 너무 '신학'이나 '신앙'의 관점으로만 해석하지 맙시다. 그 결과 윤리는 '행위'라는 개념에 국한됐고 '죄성'이란 의미는 기독교의 모순적 모습을 합리화시키는 변명거리로 사용됐습니다.

이웃의 개념을 잃은 기독교는 스스로 '우리'라는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동안 '우리(기독교)'가 괜찮으면 '모두(세상)'가 괜찮은 거라 여겼습니다. '우리'가 합당하면 '모두'에게 합당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그건 어느새 기독교가 비도덕적인 일도 감행할 수 있는 명분이 됐습니다.

하지만 그 명분은 정말 누구를 위한 것이었을까요. 이제는 기독교가 진지하게 자문해볼 때입니다.

오늘날 사회가 왜 기독교를 외면한다고 보십니까.

어쩌면 그건 기독교가 진정한 의미에서 이웃의 개념을 생각하지 못한 결과 아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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