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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즘] '한글 오염 주범' 10대를 위한 변명

안유회 / 선임기자

지난 9일이 한글날이었다. 이 날만 되면 꼭 나오는 기사의 제목이다. '세종대왕에게 부끄러운 한글날' '암호수준 외계어, 흔들리는 우리말'. 어떤 기사는 "청소년을 중심으로 언어 왜곡이 심화되는…"이라고 쓰고 있다. 은어와 줄임말, 외국어 사용이 한글을 망친다는 것이다. 우리 모두 한때는 한글을 망친 청소년이었으므로 한글 오염의 주범으로까지 비난받는 10대를 위한 변명을 하고 싶다.

우선 은어. 이거 안 쓰고 10대를 넘긴 어른이 있을까. 은어는 좀 품위가 없다. 인간이 항상 품위있는 존재가 아닌데 그런 인간이 쓰는 언어가 항상 품위가 있을 수 있나. 폐인과 얼짱을 쓴다고 한글을 망쳤다면 한때 '골때린다'는 은어를 썼던, 지금의 어른들은 한글을 잘 가꾸셨나 싶다. 은어는 끼리끼리의 결속을 확인한다. 그래서 배타적이기도 하다. 은어를 쓰는 재미가 어른들 못 알아듣 게 하려는 것인데 이해 안 가는 외계어라고 너무 타박하지 않으면 안 될까. 그리고 어른들도 은어 쓰지 않나.

그 다음이 줄임말. 예전엔 내용없음을 냉무라고 하는 소박한 수준이었는데 요즘은 복잡하다. 그 중 하나가 낄끼빠빠. 낄 때 끼고 빠질 때 빠진다는 뜻이라는 데 다행히 쓰긴 어려워도 이해하긴 그나마 쉽다.

말을 줄이는 것은 경제성 원칙 때문이다. 카카오톡을 해보면 이해가 간다. 통신어라는 게 기본적으로 필담이다. 글로 써서 대화를 한다. 글 쓰는 게 말하는 것보다 빠를 수는 없는 법. 손이 좀 느리면 대답을 하기 전에 두번째 대화가 날아온다. 최대한 줄일 수밖에 없다. 어른들도 그러지 않나. 카카오톡을 카톡으로, 다시 ㅋㅌ으로. 그리고 영화제목 '내 여자친구를 소개합니다'를 '여친소'로 줄인 건 어른들 아닌가. 지적 대화를 위한 넓고 얇은 지식은 지대넓얇으로 줄여쓰고. 사투리도 그렇다. 지름은 기름의 사투리인데 발음해보면 지름이 입술을 덜 움직인다.



요즘은 정보량이 엄청나게 늘었다. 그 많은 양을 소화하려니 줄임말이 늘 수밖에. 그렇다고 소녀시대를 소시로 줄이는 건 심하다 싶지만.

마지막 외국어 섞어쓰기. 요즘 가장 공격받는 게 헬(hell)조선이다. 맘(mom)충이란 것도 있다. 외국어의 대부분이 영어인데 1년에 6조 원을 자녀의 영어 사교육비로 쓰는 나라의, 유치원도 모자라 태교도 영어로 하는 어른들이 영어 쓴다고 뭐라할 수 있나. 칭찬은 못 할망정. 할리우드 영화의 한국 개봉명이 '헝거게임:더 파이널'이던데 어른들은 세심하게 관사까지 챙기고 족보에도 없는 콜론도 따라한다.

언어는 권력이다. 한때 성경은 라틴어로만 나왔고 옛날 동아시아에서는 한문을 아는 것 자체가 권력이었다. 그래서 어른들은 기를 쓰고 영어를 가르치려 하나 보다. 그러니 어른들부터 한글을 사랑하도록. 그러고 보면 당시 중국 주도의 한자체제에 반기를 드는 것으로 해석될 수도 있음에도 한글창제를 하신 세종대왕이 대단하다.

언중은 쓰고 싶은 말을 쓴다. 쓰기 싫은 말은 안 쓴다. 좋은 말이든 나쁜 말이든 다 필요하니까 쓴다. 그러니 나쁜 말 안 쓰게도 해야 하지만 좋은 말을 쓰도록 가르치는 데 더 힘쓰는 한글교육을 하면 된다. 그건 이미 세종대왕이 훈민정음 해례본에 적어놨다.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한자와 서로 통하지 않으니 어리석은 백성이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제 뜻을 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내가 이를 불쌍히 여겨 새로 스물여덟 자를 만들었으니 사람마다 쉽게 익혀 날마다 쓰는 데 편하게 하고자 할 따름이다."

'말하고 싶은 것을 뜻하는 바를 살펴서 잘 펴는 것.' 이게 언어교육의 핵심이다. 언어는 나를 표현하는 수단이다. 그러려면 좋은 글을 읽게 하고 글을 많이 쓰도록 해야 한다. 그래야 내 뜻을 잘 전달할 수 있다. 그걸 가르치는 건 어른들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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