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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 에어] '라면의 길은 아직도 멀다'

부 소 현 / JTBC LA특파원·차장

나이가 들수록 좋고 싫음이 분명해져 당황스럽다. 마음이 좀 유해져야 하는 것이 순리일텐데, 점점 더 까다로워져 걱정이다. 만나고 싶은 사람, 아닌 사람, 좋아하는 음식, 입에도 대기 싫은 것들…. 그 중 가장 심한 것이 책과 음악이다.

어릴 땐 별 흥미 없는 책도 한번 읽기 시작하면 어느 샌가 빠져들어 끝을 봤고 음악도 가리지 않고 즐겼는데 이젠 그게 잘 안된다. 한없이 까다로워진 취향 때문에 피곤하지만 대신 마음에 드는 책이나 음악을 조우했을 때 얻는 기쁨은 배가 됐음을 위로 삼는다.

얼마전 마음에 쏙 드는 책을 발견했다. 김훈의 신간 '라면을 끓이며'. 작가 김훈의 팬이 된 것은 '남한산성' 이후다. 남성적인 역사소설을 즐기지 않는 편이라 큰 기대없이 읽기 시작했는데 책장을 넘길 때마다 작가의 뛰어난 문장력에 빠져들었다. 병자호란 당시 남한산성에 갇힌 무기력한 인조의 속내를 마치 들어갔다 와 본 것 처럼 묘사한 작가의 치밀함에 놀랐던 기억은 아직도 생생하다.

한줄이라도 놓치기 아까워 집중해서 읽느라 시간은 배로 들었지만 그만큼 감동은 컸다. 이후 기행산문집 '풍경과 상처', 소설 '칼의 노래', '현의 노래'도 흥미롭게 읽었다. 다 읽지 못하고 덮은 책도 있긴 하다. 소설 '흑산'은 영 진도가 나가지 않아 사 놓고 다 읽지 못해 포기한 책들 사이에 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자칭 김훈의 팬이지만 까다로워진 취향 탓에 신간이 나왔다고 덮어놓고 사지는 않는다. 그런데 이번 책을 꼭 사 읽겠다고 결심한 건JTBC 뉴스룸 인터뷰 때문이다. 작가 김훈을 글이 아닌 말로 만난 것은 아마 처음이었는데 그의 말은 마치 글 같았다. 그는 책을 써내면서 다시는 이 짓을 안 한다고 결심을 한다고 털어 놓았다. 매번 책을 쓸 때 마다 같은 생각을 하느냐는 손석희 앵커의 질문에 "내가 쓴 책을 잘 거들떠보지 않아요"라며 "너무 무섭고 징그럽고 참 아득한 느낌이 들어서 안보는데. 다시는 쓰지 말아야겠다 그렇게 맹세를 해놓고 한 두어 달이 지나면 또 쓰는 거예요. 그것이 참 나의 팔자고 나의 비극이로구나 라고 생각하고 있어요"라고 답했다.

이어 글을 쓰는 목적은 자신을 표현하기 위함인데 자신의 진실, 슬픔, 고통, 기쁨, 악과 억압을 표현함으로써 남에게 이해받고 싶다는 소망이 있다고 말했다. 작가는 이런 소망을 글을 통해 거짓없이 표현하고자 하는 자신의 욕망을 '무섭고 징그럽다'는 말로 대신 했다고 생각한다. 한껏 기대에 부풀어 읽기 시작한 책 '라면을 끓이며'는 까다로워질대로 까다로워진 책에 대한 못된 취향을 단숨에 없애 줄 만큼 흡족하다.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너무 개인적이거나 사회적이지도 않다. 살짝 불편한 세미 정장을 입고 다소 낯선 길을 걷는 느낌이랄까.

작가는 책에서 '파와 계란의 힘으로 조금은 순해진 내 라면 국물의 맛을 36억개의 라면에게 전하고 싶다. 그런 생각을 하다가 한눈을 팔면서 라면이 끓어 넘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라면의 길은 아직도 멀다'고 적었다. 여기에 이어지는 작가 김훈만의 라면 끓이는 비법은 이 칼럼을 읽고 책에 호감을 갖게된 독자들을 위해 적지 않겠다.

비록 천사의 도시 로스앤젤레스는 책을 펼치고 싶은 마음이 절로 들 정도의 가을 날씨를 선사받지는 못했지만 출출한 저녁, 작가 김훈의 라면을 끓이는 비법을 탐해 보는 것은 어떨까? 오랜만에 만난 마음에 쏙 드는 책의 페이지가 줄어가는 것이 아쉬운 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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