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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창] "전하, 이러시면 아니되옵니다"

[LA중앙일보] 발행 2015/11/03 미주판 8면 기사입력 2015/11/02 19:00

이종호/논설위원

#.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란 것이 있다. 세계 역사와 문화에 중요한 영향을 끼친 기록물이나 자료 등을 뽑아 인류 공동의 자산으로 보호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올 10월에도 47건이 새로 등재돼 107개국 348개에 이른다.

세계기록유산을 가장 많이 보유한 나라는 독일로 21개다. 두 번째는 영국과 폴란드로 14개, 오스트리아와 러시아가 각각 13개로 그 다음이다. 한국은 어떨까? 놀라지 마시라. 13개나 된다. 세계 공동 4번째, 아시아 국가 중에서는 가장 많다. 올해 KBS 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관련 기록물과 조선시대 '유교책판'이 추가로 지정된 결과다. 중국은 난징대학살 문건이 등재됨으로써 10개가 됐다. 일본은 5개다.

한국의 세계기록유산 13개 중 8개가 조선시대 것이다. 가히 기록의 나라였다고 할 수 있다. 그 8개는 ▶훈민정음 해례본 ▶조선왕조실록 ▶승정원일기 ▶조선왕조의궤 ▶동의보감 ▶일성록 ▶난중일기 ▶유교책판이다. 나머지 5개는 고려 때 만들어진 ▶직지심체요절 ▶해인사 대장경판과 제경판, 그리고 우리 동시대 유산인 ▶5.18 관련 기록 ▶새마을운동 관련 기록 ▶KBS특별생방송 '이산가족을 찾습니다' 관련 기록물이다.

#. 올해 지정된 조선시대 책판에 눈길이 간다. '한국의 유교책판'이라는 이름으로 등재된 이 기록유산은 조선 선비들의 저작물을 찍어내기 위해 나무에 새긴 인쇄판이다. 영남지역 305개 문중과 서원에서 기탁한 6만4226장의 목판으로 문집, 족보, 예학서, 역사서, 전기, 지리지 등 종류도 718종이나 된다.

보물도 알아보지 못하면 고물이다. 아무리 귀중한 물건도 가치를 모르면 쓰레기가 된다. 이 책판들이 그랬다. 고서를 찢어 벽지나 창호지로 썼다는 이야기가 한때 항간에 회자되곤 했지만 조선시대 책판 역시 아무렇게나 굴러 다녔다. 어떤 집에선 땔감으로, 또 어떤 집은 빨래판으로도 썼다. 그러다 경북도와 국학진흥원이 수집에 나섰다. 2005년 전용 수장시설인 장판각도 만들었다. 그제야 비로소 체계적인 보존 관리가 가능해졌다. 마침내 이번에 세계적 문화재로서의 가치도 인정받았다.

유교책판의 의미는 공론(公論) 사회의 일면을 보여 준다는 데 있다. 웬만한 조선 선비들은 모두 글을 썼고 책을 남겼다. 하지만 유통은 딴 문제였다. 사회적으로 널리 읽혔으면 하는 책을 고르고 그것을 인쇄할 책판 제작을 결정한 것은 지역 선비들의 여론 수렴을 거친 다음이었다. 유네스코가 주목한 점도 이것이었다. 조선시대 문중 혹은 지역 공동체가 나름 건강하게 유지될 수 있었던 것은 이렇게 당대 지식인들의 공론화 과정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 우리 기록유산의 백미는 조선왕조실록이다. 태조 이성계부터 철종 임금 때까지 25대 472년간(1392~1863)의 대기록이다. 마지막 두 임금 고종과 순종 실록도 있지만 일제 때 편찬됐기에 끼지 못한다.

세계 어디에도 이렇게 긴 세월 국왕과 조정의 기록을 자세히 남긴 나라가 없다. 더 대단한 것은 실록 편찬과정에서의 독립성과 비밀성이었다. 실록의 기초 자료였던 사초 작성에서 실제 편술까지 간행 작업을 맡았던 사관(史官)은 임금도 함부로 하지 못했다. 기록의 지엄함을 알고 역사를 두려워할 줄 알았던 나라의 위대한 전통이었다. 조선은 대단한 나라였지만 흠결도 많은 나라였다. 하지만 임금의 공과를 가감 없이 기록으로 남길 수 있었다는 것만으로도 허물의 많은 부분이 상쇄된다.

요즘 박근혜 정부의 역사 교과서 국정화 강행 방침을 두고 우려하는 이들이 적지 않다. 지식사회의 공론에 귀 막고, 사관(역사학자)들의 고언마저 묵살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통령에 비길 수 없을 만큼 막강 권력을 가졌던 조선 국왕도 "전하, 이러시면 아니되옵니다"라는 간언에는 움찔했었다. 아무래도 세상이 거꾸로 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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