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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명복 칼럼] 권력은 짧고 역사는 길다

[조인스] 기사입력 2015/11/03 11:24

나라 꼴이 말이 아니다. 실의에 빠진 젊은이들은 ‘헬조선’을 외치며 아우성인데 정치권은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둘러싸고 한 달 넘게 사생결단의 싸움을 벌여 왔다. 여야 정치인들의 막말을 듣다 보면 스스로 창피하고 부끄러워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다. 이성이고, 논리고 없이 내키는 대로 마구 쏟아내는 느낌이다.

최근 들은 막말 중 단연 으뜸은 집권당인 새누리당의 이정현 최고위원 입에서 나왔다. 지난주 국회 예산결산특별위원회에서 그는 (국정화에 반대하는 것은) “언젠가 북한 체제로 적화통일이 될 것으로 보고, 그들의 세상이 됐을 때를 대비해 남한 어린이들에게 미리 교육시키겠다는 의도 아니겠느냐”고 따져물었다. “이런 불순한 의도가 아니고서야 어떻게 이런 교과서를 만들어 가르치려고 하고, 그것을 고치자고 하는데 그렇게 온몸을 던져 반대하느냐”고 목청을 높였다.

그의 말대로라면 현행 국사 교과서를 집필한 역사학자들부터 검정을 통과시킨 현 정부의 교육부 관계자들, 학생들에게 가르친 교사들, 이를 방조한 학부모들까지 모조리 적화통일을 바라는 종북주의자들이다. 그 교과서로 배운 학생들도 잠재적 ‘빨갱이’들이다. 국정화 반대 성명서에 서명한 수많은 교수, 교사, 대학생, 시민단체 사람들도 다 종북 용의자들이다. 국민에 대한 모욕이자 국가에 대한 모독이다. 본인은 충성심에서 한 말이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그로 인해 국정화에 대한 반감만 더 커졌다면 그건 충성이 아니라 불충(不忠)이다.


때맞춰 나온 북한 지령설도 역겹기는 마찬가지다. 출처도 불분명한 ‘정통한 대북소식통’을 근거로 일부 신문이 북한이 국정화에 반대하라는 지령을 내렸다고 1보를 날리자 새누리당의 친박계 의원들이 기다렸다는 듯이 뒤를 받치고 나섰다. 친박계 좌장인 서청원 최고위원은 “지령을 받은 단체와 개인이 누구인지 철저히 밝혀야 한다”며 사법당국의 수사를 촉구했고, 원유철 원내대표는 “북한이 국내 종북세력에 지령문을 보낸 것은 남남갈등을 유도하려는 전형적인 통일전선 전술”이라며 북한 배후설을 기정사실화했다. 대한민국 국민을 너무 우습게 보는 처사다.

야당도 오십보백보다. 제1 야당인 새정치민주연합의 이종걸 원내대표는 “새누리당 일부 의원을 보면 역사 교과서 정상화를 주장하기 전에 두뇌 정상화가 시급해 보인다”며 “그냥 친박이 아니라 ‘친박 실성파’라고 부르고 싶다”고 대놓고 정신병자 취급을 했다. 같은 당의 주승용 최고위원은 박근혜 대통령의 국회 시정연설 내용을 비판하면서 “듣다 보니 정신적인 분열 현상까지 경험하게 된다”고 독설을 날렸다.

문재인 대표는 “집필되지도 않은 교과서를 두고 왜곡이나 미화 걱정을 한다는 게 말이 되느냐”는 박 대통령의 일침에 “똥인지 된장인지 먹어봐야 아느냐”고 되받아쳤다. 대선 후보까지 지낸 공당 대표의 품격을 의심케 하는 저질 발언이다. 정연한 논리로 조목조목 따져도 모자랄 판에 저급한 말장난이나 하고 있으니 야당에 대한 실망과 혐오감이 커질 수밖에 없다.

논란의 중심에는 박 대통령이 있다. 그는 한나라당 대표였던 2005년 1월 연두 기자회견에서 “역사에 관한 일은 역사학자가 판단해야 한다”며 “어떠한 경우든 역사에 관한 것을 정권이 재단해서는 안 된다”고 말했었다. 그랬던 그가 지금은 앞장서서 역사 교과서 국정화를 부르짖고 있다. 기존의 검인정 역사 교과서들을 좌편향으로 규정하고, 국가가 위촉한 역사학자들 손으로 올바른 역사 교과서를 새로 쓰게 하겠다는 것이다.

역사 교과서에 잘못이 있다면 시정하고, 왜곡과 편향이 있다면 바로잡아야 한다. 문제는 방식이다. 그것을 국가가 주도하겠다는 것은 북한과 같은 전체주의 국가에서나 하는 일이다. 국가가 만든 단일 교과서를 강요하는 것은 역사 해석을 국가가 독점하겠다는 발상이다. 역사는 정권의 전유물이 아니다. 역사에 대한 해석은 박 대통령 말마따나 역사학자들 몫이다. 각자의 사관에 따른 서로 다른 해석을 용인해 줘야 한다. 국민 다수가 반대하고, 역사학자들 절대다수가 반대하는 국정화를 대통령의 판단과 의지, 추종세력의 힘으로 밀어붙이는 것은 오만이고 독선이다. 국민이 주인인 민주공화국에서 있기 어려운 일이다.

돌이키기 어렵다면 국정과 검인정 교과서를 경쟁시키는 병행 체제로 가는 방안을 전향적으로 검토할 필요가 있다. 무조건 안 된다고 할 게 아니다. 오늘 확정고시가 이루어지고, 이대로 국정화가 진행된다면 국정(國政)은 국정대로 망가지고, 국정 교과서는 국정 교과서대로 시한부로 끝나는 최악의 결과가 올 수 있다. 권력은 짧고, 역사는 길다. 앞이 뻔히 보이는데 왜 그런 무리수를 고집한단 말인가.

배명복 논설위원·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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