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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20/20] 사할린 아리랑

김완신 편집위원

한인 교회의 초청으로 LA를 방문한 사할린 동포들이 오늘 한국으로 돌아간다. 일제징용으로 끌려가 사할린에 살다가 5년전 한국에 정착한 사할린 동포들을 미주 한인사회가 초청해 동포애를 나눈 것은 매우 뜻깊은 일이다. 이들 방문단은 LA한인사회의 환대를 받으며 따뜻한 핏줄의 정을 느꼈을 것이다.

동토의 땅 사할린은 1905년 러일 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함에 따라 일본 영토로 귀속된 섬이다.

1937년 10월 일본은 강제징용을 통해 한국인들을 그곳에 이주시켜 탄광과 운수업 노동자로 살게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을 때 눈물로 고국을 떠났던 사할린 동포들은 일제강점으로 타국에 살게 됐지만 해방된 조국은 그들을 불러줄 것이라는 희망에 부풀었다.



그러나 일본도 한국정부도 그들을 외면했고 그후 60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토록 그리워했지만 갈 수 없는 조국은 가슴에 한으로 남았다.

종전 후 독일 일본 등은 전쟁 중 타국으로 갈 수 밖에 없었던 재외난민의 본국 이주를 위해 적극적으로 나섰고 귀국 난민들을 영웅으로 대접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은 해방을 맞고 정부가 수립됐어도 사할린 동포들을 차가운 땅에 방치했다. 더욱이 사할린 징용자 문제의 당사국이었던 일본과의 한일협정에서도 이들 문제는 언급조차 되지 않았다.

현재 사할린에는 4만여명의 한국인이 거주하고 있다. 주류인 러시아인을 제외하고는 가장 큰 소수민족이다. 이미 3~4대까지 뿌리를 내린 한인들 중 5000여명은 한국행을 원하고 있다고 한다.

지난 2002년 2월 한국정부가 건국후 처음으로 사할린 동포들의 영주 귀국을 허용했다. 그러나 영주 허용도 징용자 고령자 우선이라는 제한을 두고 있다. 사회적인 부담을 고려한 조치였다.

죽어서라도 고국에 묻히고 싶다며 한국행을 원하는 한국인 1세대들은 자식과 손주들을 두고 갈 수가 없어 한국정부의 처사에 원망만 하고 있다. 반세기 고통의 세월을 넘어 그리운 고국을 찾아가려해도 가족과 떨어져 살아야 하는 또다른 고통이 기다리고 있기에 그들은 결심을 못한다.

사할린은 19세기 중반부터 러시아에서 추방당한 혁명가들과 죄수들을 유배시킨 곳이다. 혹한의 날씨는 겨울철에 영하 20~26까지 수은주가 내려간다. 러시아로 돌아갈 날만을 기다리며 혁명가와 죄수들이 살았던 그 땅을 러시아 작가 안톤 체홉은 '슬픔의 틈새'라고 말하기도 했다. 이 유배의 땅에서 사할린 동포들은 험난했던 한국 근대사의 질곡을 감수해야 했다.

한국은 지금 세계화로 향하고 있다. 그러나 한핏줄의 동포들 조차 끌어 안지 못하면서 세계화를 외치는 것은 위선일 뿐이다. 세계각국이 지구촌 어디에 살든지 관계없이 자국의 국민들을 포용하는 시대에 불운의 역사를 한몸으로 겪어온 사할린 동포를 외면해서는 안된다. 역사의 양지에 그들을 다시 세워야 한다.

징용 1세대들은 그들을 버린 조국을 원망하며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리워하며 살았다. 그들은 아직까지 한국어를 잊지 않았고 아리랑 노래를 기억하고 있다. 얼마전에는 '사할린 아리랑' 가사를 공모해 지난 세월의 한탄과 고국을 향한 마음을 담았다고 한다.

역사의 파란과는 상관없이 사할린 아리랑은 계속될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부르는 아리랑이 더 이상 슬픈 가락으로 이어지게 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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