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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 로그인] 왔다, '블랙 에브리데이' 시대

[LA중앙일보] 발행 2015/11/30 미주판 9면 기사입력 2015/11/27 20:31

최 주 미 / 조인스 아메리카 차장

십 수년 전 추수감사절이라는 미국 명절을 처음 맞았다. 추석 비슷한 날인데 송편과 제사 대신 칠면조와 고구마, 옥수수의 낯선 정찬을 먹으며 가족, 이웃과 감사를 나누는 날이라고 했다. 모일 가족도 없거니와 어느날 갑자기 남의 땅에 들어왔다고 냉큼 낯선 명절 음식까지 챙겨먹어야 할 이유를 몰랐던 내게는 그냥 '노는 날'이었다.

늦잠 실컷 자고 문 밖에 나섰는데 하품나는 거리는 한산하고 적막했다. 상점들은 문을 닫았고 도로는 텅 비었다. 떨어져 지낸 가족들 모이는 날이라더니 죄다 들어앉아 터키만 뜯는건가? 어디 해외 나들이라도 다들 떠났나?

그런데 이튿날 저녁 퇴근길, 동네로 들어서던 나는 깜짝 놀랐다. 적막한 어둠 속에 숨죽인 듯 가라앉아 있던 거리가 온통 휘황한 불빛으로 가득했다. 지붕에 창문에 나뭇가지에 초롱초롱 매달린 크리스마스 장식들의 반짝이는 수다로 어둔 11월 저녁의 골목길은 넘치게 화려했다. 대체 이 사람들이 언제 이걸 준비했지? 어떻게 이렇게 한꺼번에 바뀔 수 있는 거지? 당시 103.5 FM에서 퇴근길 내내 크리스마스 캐럴만 흘러나오던 것도 의아했다.

그때 배웠다. 추수감사절까지는 다같이 최고의 추수감사절을 위해 충심과 정성을 쏟고, 이튿날부터는 싹 씻은 얼굴로 대망의 크리스마스 시즌을 시작하는 전통이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그 시작을 위해 공들여 크리스마스 장식을 준비하고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가 금요일 밤 일제히 점등 스위치를 올린다는 사실을. 상점들은 블랙 프라이데이 빅세일의 서프라이즈를 위해 하루 온전히 숨어있다가 팡파르 울리듯 동시에 활짝 문을 열어 증폭된 쇼핑의 기쁨을 선사한다는 사실을. 그리고 그 곁에는 추수감사절 이튿날 신데렐라처럼 캐럴 방송으로 변신하는FM라디오의 작은 세레모니가 있다는 그 모든 사실을 말이다.

나는 미국인들의 이 깜찍한 전통이 무척 마음에 들었다. 법이나 명령이 아닌 사람들간의 자발적인 약속이 존재하고 전통으로 지켜진다는 사실이 경이로웠다. 누구 하나가 약속을 깨버리고 나면 허망하게 사라질 연약한 룰이지만 그 작은 의미를 소중히 가꿔가는 의식에 경의를 품게 되었다.

그런데 이 전통이 사라졌다. 2011년 월마트가 추수감사절 당일 밤 10시부터 세일을 단행하면서 프라이데이 오전 오픈의 시간 한계선을 무너뜨린 것이 시작이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밤샘 줄서기 전쟁에 나서지 않아도 클릭 한번에 세일상품을 선점할 수 있는 온라인 쇼핑의 대중화와 불경기 마케팅의 전략적 필요성이 진짜 이유다.

2015년 미국의 블랙 프라이데이는 이미 유통업체들의 온라인 사전 세일로 그 경계를 지웠고 매장 오픈 시간은 금요일 새벽으로 거듭 거슬러 오르더니 이젠 많은 상점들이 추수감사절에도 문을 연다. 연휴 끝에는 온라인으로 할인 쇼핑을 할 수 있는 '사이버 먼데이'가 한 겹 더 배수의 진을 치며 맺고 가르는 시즌의 구분을 무가치하게 만든다.

마켓의 변화는 '사소한 전통'의 변화로도 이어졌다. 수년 전부터 103.5FM은 성급한 11월의 캐럴을 틀어대고 있다. 크리스마스 장식들은 저마다 불쑥불쑥 점등하며 팡파르의 영광을 잃었다. 내게 경외심을 일으키던 미국인들의 연대감은 오직 할인 쇼핑 안에서만 존재하게 된 것인가. 전통이니 뭐니 그게 다 무슨 소용? 남보다 한발 먼저 이목을 끌어야 살아남는 이 불황에!

사이버 먼데이도 모자라 이젠 사이버 위크로, 아니 블랙 프라이데이 이전에 블랙 에브리데이로 부피만 자꾸 커져가는 지금은 전방위 쇼핑의 계절, 사이버 에브리데이의 나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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