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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 전 한국은 가난했지만 신앙의 순수함 있었다"

한국에서의 13년, 마지 팔리 선교사 인터뷰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 첫 선교사
1956~1969년까지 한국서 활동
가난했던 한국, 사명 깨닫는 계기
"무뚝뚝한 첫인상 그래도 정 깊어"
모든게 발전한 지금의 한국 놀라워
영적으로도 성장하는 나라 됐으면


선밸리 지역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는 1956년도에 세워졌습니다. 현재 미국 교계가 ‘21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목회자’로 손꼽는 존 맥아더 목사가 시무하는 교회입니다.

이 교회에는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이 있습니다.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가 그 해 개척과 함께 제일 먼저 한 일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바로 한국에 선교사를 파송한 일 입니다.

마지 팔리(Margie Farley) 선교사는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의 첫번째 파송 선교사입니다. 그녀는 올해로 90세가 됐습니다.



지난 18일 마지 팔리 선교사를 만났습니다. 팔리 선교사에게 남겨진 60여년 전 한국의 흔적은 몇 장의 흑백 사진이 전부이지만 그때의 기억은 선명한 색을 입고 그녀의 머릿속에 또렷하게 남아있었습니다. 어느덧 주름이 깊게 패인 팔리 선교사는 추억을 회상하듯 당시 한국의 삶을 들려주었습니다.

장열 기자

jang.yeol@koreadaily.com

※ 인터뷰를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마지 팔리 선교사의 이야기를 1인칭 화법으로 정리했습니다.

배 타고 한국가던 시절
(팔리 선교사는 할머니가 손자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려주듯 하나씩 기억을 되짚었다. 13년간(1956~1969년) 한국에서 선교사로 활동했지만, 오랜 세월이 흘러 간단한 한국어마저 다 잊어버렸다. 팔리 선교사는 기자에게 웃으며 한가지 질문을 던졌다. 인터뷰는 그렇게 자연스럽게 시작됐다.)


미국에서 한국으로 갈 때 뭐 타고 가시나요? 당연히 '비행기'라고 말하겠지만, 아마 '배'를 타고 한국에 가본 사람은 저밖에 없을거예요.

1956년 봄이었죠. 그때 한국을 가려고 샌프란시스코에서 배를 탔는데요. 자, 놀라지 마세요. 한국까지 배로 30일이 걸릴 때였으니까…상당히 오래된 이야기죠?

크루즈 처럼 크고 멋진 배를 상상하지는 마세요. 그때는 '코리아'라는 나라가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을때니까 소수의 선교사나 군인이 아니면 한국으로 나가는 미국인이 거의 없었죠. 제대로된 교통 수단이 있을 리가 없죠.

그때 나는 아주 낡은 배를 탔는데 화물칸 같은 데서 잤어요. 어땠냐고요?(웃음) 배를 타자마자 속이 울렁거리는데, 30일 내내 멀미만 했던 기억이 나요. 태풍도 한번 만났죠. 그때 생각만 하면 어휴…얼마나 배 타는게 힘들었고, 무서웠는지 한국에 도착해서 내리자마자 가장 먼저 한 말이 뭔지 아세요? 다시는 한국땅을 떠나지 말아야겠다고 했어요. 미국에 가려면 배를 다시 타야 하니까요.(웃음)

안아주는 게 필요했던 시절
(팔리 선교사가 첫 발을 내딛은 곳은 '부산' 이었다. 당시 그녀는 바이블칼리지를 졸업한 뒤 미국인 선교사 부부를 돕기 위해 한국행을 결정했다. 그때 나이가 31세 였다. 미혼인 그녀는 평생을 선교사로 헌신하고 있다.)


부산에 내렸는데 정말 아무것도 없었어요. 제 하얀 얼굴이 신기했나봐요. 꼬마 아이들이 쳐다보면서 졸졸 따라오는데 그 초롱초롱한 눈망울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어요.

한편으론 마음이 정말 아팠죠. 갑자기 눈물이 났어요. 맨발로 다니는 아이들이 많았죠. 옷도 낡고 지저분했어요. 얼굴엔 콧물도 묻어있었죠. 미국 아이들과 비교해보면 너무 다른 모습이었어요.

한동안 멍하게 서서 지나다니는 사람들을 봤어요. 아이를 등에 업고 짐을 머리에 지고 가는 여자부터, 흙먼지가 이는데 그대로 땅바닥에 앉아 놀고 있는 아이들이 보였어요. 총을 든 한국 군인들도 많이 지나다녔어요.

당시 한국의 집 창문은 대부분 창살에 종이를 붙여 만들었어요. 문 틈으로 바람이 엄청 들어왔죠. 너무 추웠던 기억이 나요.

그때는 "정말 가난하구나" "이렇게 어려운 나라도 있었구나"라는 생각만 들었어요. 환경이 열악하니까 다른 생각은 할 수가 없었어요.

하지만 그런 한국의 모습은 나를 한국땅으로 보내신 하나님의 뜻을 더 분명히 깨닫게했죠. "아, 이래서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구나"라는 확신이 들었어요.

나는 서울과 부산, 강원도 등에서 선교 사역을 했어요. 미국 목사님을 도와 주로 어린이 사역을 담당했죠. 교회가 세워지면 주일학교가 만들어지잖아요. 거기서 간단한 영어와 성경을 가르쳤고 아이들과 함께 시간을 보냈어요.

그때 한국의 아이들은 사랑이 많이 부족했어요. 전쟁 고아가 너무 많았거든요. 부모의 사랑을 제대로 받지 못한채 자라나는 아이가 많았어요. 먹을 게 없어서 굶는 아이도 많았고요.

제가 했던 사역은 사실 특별한 게 아닌데, 달리보면 너무나 특별했어요. 그 아이들을 따뜻하게 안아주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이 너무 좋아했어요. 그만큼 그때 한국의 상황은 모든 면에서 사랑이 필요했던거예요.

나는 한국사람들이 너무 좋았어요.

첫인상은 다소 무뚝뚝해 보이지만 깊이 알면 한국 사람만큼 따뜻한 사람들을 못봤거든요.

언어가 달라서 말은 제대로 안통했지만 종종 미국 음식을 주면 한국사람들은 그렇게 어려운 환경에서도 꼭 한국 음식을 만들어서 저에게 먹어보라고 주었어요. 그만큼 남을 생각할 줄 아는 사람들이예요. 배고프고, 가난했지만 조금이라도 기쁜 일이 있으면 잘 웃었어요. 한국 사람들의 그런 모습이 참 보기 좋았어요.

누군가는 가야할 곳

왜 한국을 가게 되었냐고요? 제가 태어난 동네는 완전 시골이었어요. 교회도 없었죠. 하지만 젊었을 때 캘리포니아로 오면서 한 교회에서 예수님을 영접하게 됐어요.

로마서 12장1~2절이 제 삶을 바꾸는 계기가 됐는데 그러면서 제 어린 시절을 떠올리게 됐죠. 누군가 내가 살던 동네로 와서 기독교 복음을 전해주었다면 더 빨리 신앙을 갖게 되지 않았을까라는 안타까움이었어요.

그게 한국이라는 생소한 나라로 선교를 떠나게 된 이유였어요. 당시 한국도 그랬거든요. 전쟁의 아픔이 있었고, 너무나 가난했던 그 나라에 누군가는 '복음'을 전해야 했죠. 그래야 사람들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으니까요. 솔직히 한국으로 떠나는 게 두렵기도 했죠. 그때 정보가 너무 없어서 도서관에 가서 한국 관련 책을 뒤져봤는데, 당시 한국에 대한 책은 거의 없었어요.

한국에서 13년간의 삶도 쉽지는 않았죠. 시대적으로 너무 어려울때니까요.

그래도 누군가는 그 땅에 씨앗을 뿌려야 하잖아요. 저 말고도 한국으로 나갔던 수많은 외국 선교사들이 그런 마음으로 사역을 감당했을거예요.

나는 용기를 잃을 때마다 늘 예레미야 18장6절의 성경 구절을 생각했어요. 나는 진흙이고 하나님이 토기장이라는 내용이에요. 하나님이 내 인생을 빚어가시는거니까 나는 그분께 내 삶을 드릴뿐이죠.

(팔리 선교사는 이후 풍토병에 걸렸다. 그녀는 건강상의 문제로 13년간의 한국 사역을 마치고 1969년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다. 팔리 선교사는 "하나님이 나를 너무 사랑하셔서 돌아갈 때는 비행기를 보내주셨다"고 말했다. 13년 사이 교통 수단의 변화와 발전을 빗댄 행복한 농담이었다.)

한국, 영적으로도 성장하길…

지금의 한국이요? 와~정말 믿을 수 없을만큼 모든 게 변했더라고요. 정말 제가 있던 그 한국이 맞나 싶을 정도예요.

저는 미국에 온 후 1980년대, 1990년대, 그리고 최근에는 2006년도 등 3번 한국을 방문했어요. 한국 교계에서 저를 초청했었거든요.

정말 감탄이 저절로 흘러나왔어요. 솔직히 말하면 미국 보다 더 잘 사는 것 같아요.

하지만 그러한 발전이 과연 영적인 성장으로 이어졌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오늘날 한국 교회에 대한 안타까운 소식을 종종 들어요. 과거를 떠올려보면 고난 가운데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하나님을 붙들었는데요. 제가 한국에서 사역할 때만해도 한국사람들은 복음에 대한 열정이 엄청 뜨거웠고, 신앙이 참 순수했어요. 그런 부분이 지금의 한국을 있게한 바탕이 됐다고 보는데…

고난은 그리스도인을 더욱 자라나게 하고 예수님을 닮아가게 만들잖아요.

기독교가 과거 한국 사회에 미친 영향은 정말 컸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때의 순수했던 모습이 많이 사라진 것 같아 아쉬운 마음은 들어요.

마지막으로 예수님은 언제, 어디에나 계시는 분이예요. 그만큼 예수님은 우리를 사랑하시거든요. 성도는 그분을 섬기는 게 전부가 돼야 해요. 다른 것에 마음을 너무 두지 마세요. (웃음)

한국 위한 사역은 계속 "집으로 갈때까지 할 것"

마지 팔리 선교사의 한국 관련 사역은 계속돼왔다.

우선 그녀는 한국인을 위한 성경공부 모임을 곳곳에서 만들었다.

1980년대 한국내 여성성경 공부 모임인 ‘조이클럽’도 팔리 선교사의 주도로 설립됐다.

현재 그레이스커뮤니티교회에는 한국 여성만을 위한 성경공부 클럽인 ‘복음의향기(담당 김명희)’가 있다. 올해로 35년째를 맞은 이 성경공부 모임도 당시 팔리 선교사가 한인 교인이었던 김인자씨와 함께 시작했다. 복음의 향기에는 현재 40여명의 한인 기독 여성들이 참여하고 있다.

팔리 선교사는 현재 샌디에이고 인근 ‘마운트미구엘커버넌트빌리지’에서 은퇴한 노인들을 위해 봉사하고 있다. 헬스케어 상담도 하고, 알츠하이머 환자들을 돌보며 기독교 복음을 전한다.

팔리 선교사에게 언제까지 사역을 할 것인지 물었다.

그녀는 “집으로 갈때까지 해야죠”라고 했다.

어떤 집이냐고 물었더니, 손가락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하나님이 계신 영원한 저 집으로 갈때까지 계속 그분의 일을 감당할거에요”.

장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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