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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의 눈] "끝까지 뛰어, 약해 빠진 녀석!"

[LA중앙일보] 발행 2015/12/03 미주판 9면 기사입력 2015/12/02 22:02

오세진/사회부 기자

"아프면 다야. 끝까지 뛰어 이놈아. 약해 빠진 녀석!"

1997년 창원종합경기장. 전국 육상 대회에 나갔던 초등학교 6학년 때의 일이다. 처음 보는 아저씨가 갑자기 옆에서 호통을 쳤다. 100m 예선에서 발목을 다쳐 결승전을 뛰지 못하겠다고 감독에게 말하던 중이었다. 막말을 퍼붓는 아저씨가 무섭기도 했지만, 용기를 내 따졌다. 함께 있던 우리 감독도 한 성깔 하는 분이라 내 편이 되리라 믿었다.

"아저씨, 누군데 참견이세요!"

그런데, 오히려 감독의 주먹이 꿀밤을 때렸다. "이 분이 누군 줄 알고 이 녀석이! 빨리 몸 풀어." 감독도 아저씨 앞에서는 이빨 빠진 호랑이였다. 어디가 얼마나 아프냐고 묻던 수석 코치도 태도를 바꿨다. 결국, 억지로 경기를 뛰었다. 이 악물고 분노의 질주를 했다. 갑자기 나타난 아저씨 한 사람 때문에 고통을 참아야하는 게 화가 났다. '대체 저 아저씨가 누구기에….'

그 아저씨가 얼마 전 세상을 떠났다. 뇌출혈 후 투병 중 병마를 이기지 못하고 지난달 30일 숨을 거뒀다는 소식이 뉴스를 통해 전해졌다.

아저씨는 한국 육상 100m기록을 31년 동안 보유했던 서말구(60) 교수다. 한국 육상 단거리의 상징적인 인물이다. 그는 1979년 9월 멕시코 유니버시아드 대회 육상 100m에서 10초34에 결승선을 통과했다. 한국인 최초로 10초 벽을 허문 대기록이었다. 이 기록은 2010년 김국영(24·광주광역시청) 선수가 10초23을 기록해서야 깨졌다. 역사에 남을 대기록을 가진 분을 '아저씨'라 부르고, 감히 '무슨 참견'이냐며 대들었던 거다.

분노의 질주는 의외의 결과를 낳았다. 서 교수 덕분에 간절히 원했던 중학교 축구부로 스카우트 제의를 받았다. 비록 금메달을 따지는 못했지만, 오기로 이 악물고 뛰는 모습을 축구부 감독이 좋게 봤다고 한다. 축구 선수의 꿈은 큰 부상을 당해 접어야했다. 하지만 잠시나마 축구 선수의 꿈을 이룰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 서 교수를 오래 잊지 못했다.

의외의 곳에서 서 교수를 다시 만났다. 해병대 정훈병(사진병) 시절, 아저씨는 해군사관학교 전 교수로서 우리 부대를 방문했다. 그때 물었다. "저한테 왜 막말하셨어요. 좋은 말로 하시지."

기억하지 못하셨다. 그러면서도 마음에 남는 말씀을 또 하셨다. "목표가 있다면서 아프다고 안 하겠다는 건 말이 안 되잖아. 뛰다 쓰려져도 무조건 독하게 하는 거지. 목표 있는 인생에 핑계는 없다." 고된 해병대 생활에 허덕이기만 했던 때에 활력을 불어 넣어 준 한 마디였다.

서 교수는 2008년 한국 육상대표팀 총감독을 맡았다. 국가대표 육상팀 감독 시절, 그가 선수들에게 가장 강조했던 건 '피니시 주법'이었다고 한다. 결승선을 통과하는 지점에서 가슴을 최대한 앞으로 들이밀면서 달리는 자세다. 때때로 한 발 늦었다 싶은 선수가 금메달을 차지하는 것도 막판에 피니시 주법을 적절히 사용해서다.

2015년 달력이 이제 한 장 남았다. 종이 한 장에서 묵직한 무게가 느껴진다. '왕자 근육 재건하기' '책 50권 읽기' '제2 외국어 마스터하기.' 거창하게 세웠던 목표를 들춰보며 '이미 늦었다'는 생각이 가득했다. 후회에 젖어있을 때 들려온 서 교수의 작고 소식. 18년 전 이맘때 들어 본 그의 호통이 문득 떠올랐다. 왠지 모를 희망을 다시 품으며.

"끝까지 뛰어 이놈아. 약해 빠진 녀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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