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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과학자의 세상보기] 2월에 보는 사랑의 블랙홀

1993년 개봉된 ‘사랑의 블랙홀(원제 Groundhog Day)’은 2월에 보기 좋은 영화이다. 잘 나가는 A급 배우 출연료 정도밖에 않되는 저예산으로 만들어 제법 수익을 거두었지만 결코 히트작은 아니었고 ‘제법 잘 만든 로맨틱 코메디’ 정도 평을 듣던 영화가 지금은 불교의 윤회사상, 니체의 영겁회귀, 까뮈와 그리스 신화의 ‘시지프스의 형벌’과 비교되는 걸작의 반열에 올랐다.

Groundhog day는 펜실베니아의 전통행사로 2월 2일에 치러진다. 우리나라로 치면 동면하던 동물들이 깨어난다는 경칩에 해당하는데 마모트 비슷한 동물 Ground Hog의 행동을 보고 지겨운 겨울이 곧 끝날지 계속될지를 점치는 행사이다.

이 영화는 보는 관점에 따라 3일간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수 십년의 이야기일 수도 있다. 주인공이 끝없이 반복되는 2월 2일에 갇혀버리기 때문이다. 프랑스에선 ‘끝이 없는 하루’, 이탈리아에선 ‘처음부터 다시 시작’, 스페인에선 ‘시간의 주술’이라고 제목을 달았다. 딱딱하고 어려운 철학의 나라 독일에선 ‘그리고 매일 이어지는 마모트의 인사’라는 제목이 붙었다. 일본에선 ‘사랑의 데자뷔’라고 했다. 사랑의 데자뷔나 사랑의 블랙홀이나 거기서 거기지만 내용을 보면 아주 잘못된 번역은 아니다. 우리 나라 외에 브라질에서도 ‘사랑의 블랙홀’이라는 제목을 썼다.

퉁명스럽고 심술맞은 기상캐스터 필은 펜실베니아 펑츄토니 (Punxsutawney)시의 명물인 Groundhog day취재를 위해 출장을 간다. 사는게 재미없고 짜증나는 필은 벌써 네번째 취재하게 된 이 촌동네 행사가 지겹기만 하다. 방송은 되는대로 해치우고 한시바삐 떠나려 하지만 갑작스런 폭설에 필과 일행은 펑츄토니에 갇히고 만다.



다음날 숙소에서 눈을 뜬 필은 자신이 이 작은 마을 뿐 아니라 시간속에도 갇혀버렸음을 깨닫게 된다. 한 번도 지겨운데 그 날도, 그 다음날도 눈을 뜨면 다시 2월 2일이다. 필은 못된 장난질을 시작한다. 그날 처음 만난 여성을 유혹하거나, 은행의 돈자루를 훔쳐도 자고 나면 리셋, 만사 OK이다.

장난질도 지겨워진 필은 이번엔 같이 출장온 방송국 PD 리타를 유혹해보지만 마음대로 않되어 ‘매일’ 따귀를 맞고 끝난다. 번복되는 하루하루에 지칠대로 지친 필은 이번엔 갖은 방법으로 자살행진을 벌이지만 2월 2일 아침 6시면 어김없이 호텔침대에서 눈을 뜨게된다.

도대체 필은 2월 2일을 몇번이나 살았던 것일까? 영화에서 보여주는 2월 2일은 34번이지만 적어도 10년, 그러니까 약 3650번의 2월2일을 살았다고 한다. 그 근거로 쓰이는 것이 필의 피아노 실력이다. 리타를 유혹할 속셈으로 시작한 피아노가 나중엔 라흐마니노프를 연주하는 솜씨가 되는데 그 정도에 달하려면 적어도 10년이 걸린다는 논리이다. 한편 영화를 만든 감독은 ‘10여년은 너무 짧고 대략 30년정도’라고 생각한단다. 2월2일이 1만번 이상 반복되는 것이다.

하루하루가 되풀이되는 중에 조금씩 변해가던 필은 그동안 외면해왔던 홈리스 노인이 추운 겨울밤거리를 헤매다 쓰러져 마지막 순간을 맞는 모습을 발견한다. 그는 노인을 구할 수 있을 것인가? 매일밤? YouTube에서 가슴이 미어지는 이 명장면을 볼 수 있다 (groundhog day – all scenes with the old homeless man).

하룻동안 그 도시에서 일어나는 일을 속속들이 알게된 필은 하루종일 쉴새없이 도시를 뛰어다니며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도와준다. 필은 과연 이 무한번복의 블랙홀을 벗어날 수 있을 것인가? ‘사랑의 블랙홀’은 하루가 너무 짧다고 느끼는 사람도, 하루하루가 지긋지긋하다고 느끼는 사람도 좋아할 봄날영화이다.

▶글 내용에 관한 문의나, 다루어졌으면 하는 소재제안은 youngchool@gmail.com으로


최영출 (생명공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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