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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창]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

[LA중앙일보] 발행 2016/03/11 미주판 8면 기사입력 2016/03/10 21:15

이종호/OC본부장

#. 조선시대 국왕은 모두 27명이었다. 모두가 저마다 극적인 이야기 소재를 갖고 있지만 알아갈수록 매력적인 왕은 역시 세종(1397~1450, 즉위 1418년)이다. 뛰어난 업적도 그렇거니와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대할 때마다 '과연' 하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세종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끊임없이 책을 읽었던 호학(好學)의 군주라는 점이다. 오죽하면 아버지 태종이 어릴 때부터 밤낮으로 책을 읽는 아들의 건강을 염려해 책을 모두 치워버리라는 명령을 내렸을까. 또 하나는 실천의 군주였다는 점이다. 유교 경전과 역사, 천문, 음악, 의학 등을 두루 섭렵했지만 그저 읽어 아는 데 그치지 않고 끊임없이 조선의 현실에 적용하려 애썼다. 세종 시대의 수많은 업적은 그런 지행일치(知行一致) 통치 철학의 산물이었다.

그러나 세종의 진짜 매력은 딴 데 있었다. 그것은 한마디로 '사람 냄새'다. 세종은 우리 역사상 재론의 여지가 없는 최고 명군이었다. 하지만 뜻밖에도 건강관리에 관한 한 우리 같은 보통사람과 다를 바가 없었다. 비만과 당뇨에 시달리면서도 고기가 없으면 수라를 못들 정도로 육식을 절제하지 못했다. 눈 안 돌보고 책을 읽은 탓인지 평생 안질로 고생했으며 배뇨장애까지 앓았다. 그런 와중에도 왕비 후궁 등 부인은 6명이나 맞았고 18남 4녀라는 많은 자녀도 보았다. 지금 그런 다처다산(多妻多産)을 부러워 할 바는 아니지만 어쨌든 아들 열여덟은 조선 임금 중에서 최다 기록이다.

'사람 냄새'의 절정은 한글이다. 1443년 창제되고 1446년 반포된 한글의 원래 이름은 훈민정음, 백성을 일깨우는 바른 소리라는 뜻이다. 무수한 시행착오와 연구 노력의 땀이 있었음은 당연한 일. 거기다 중화 사대주의에 물든 사대부들의 혹독한 반대까지 무릅써야 했다. 일국의 국왕이 뭐가 아쉬워 그렇게 사서 고생을 했을까. 세종이 직접 썼다는 훈민정음 서문에 그 답이 나온다. "어리석은 백성들이 할 말이 있어도 어려운 한자를 몰라 그 뜻을 드러내기 어려워하니 내 이를 불쌍히 여겨 쉬운 스물여덟 자를 새로 만들었으니…."

백성의 눈과 귀와 입은 어떻게든 틀어막고자 하는 것이 권력의 속성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왕조 시대엔 훨씬 더 했을 것이다. 하지만 세종은 달랐다. 늘 귀를 열어 두었고 백성의 언로를 틔워주려 했다. 백성에 대한 긍휼의 마음 아니고는 설명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이런 게 진정한 '사람 냄새' 아닌가.

#. 두달 전부터 오렌지카운티로 출근하고 있다. 이곳에서도 많은 한인들을 만난다. 동포회관을 세우겠다며 동분서주하는 사람들, 6.25참전 기념탑을 건립하겠다며 뜻을 모아 뛰는 분들, 조국의 평화 통일 염원을 안고 봉사로, 기도로, 노래로 힘을 보태는 분들, 그리고 저마다 속한 단체에서 다양한 모양으로 시간과 정성과 노력을 쏟아 붓고 있는 이들…. 어떻게 보면 모두가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이다.

어떤 이는 반문한다. 자기 좋아서 하는 일인데 뭐 그리 대단하다고? 물론 그렇게 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다. 사서 고생한다는 말은 안 해도 되는 일을 일부러 해서 어려움을 자초한다는 말이다. 그러니 약은 사람은 절대 안한다. 아니 못한다. 사서 고생하는 사람은 인풋과 아웃풋의 수지타산을 잘 맞추지 못한다. 그저 세상에 대해, 사람에 대해 좀 더 관심이 있을 따름이다. 나는 그 바탕이 인간에 대한 애정이라고 믿는다.

세상은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어 한걸음이라도 앞으로 나아간다. 지금 우리가 세계 어느 민족도 갖지 못한 위대한 문자 생활을 누리고 있는 것도 사람 냄새 가득한 어진 임금의 '사서 고생' 덕분이었다. 마찬가지로 지금 사서 고생하는 사람들이 있기에 우리의 내일은 좀 더 밝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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