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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림픽마켓 열어 LA코리아타운 역사를 만들다

[인물 오디세이] LA한인타운 건립 주역 이희덕

영빈관·VIP플라자 운영 승승장구
타운 사인판·파출소 건립 앞장서
23%로 이자 폭등하며 파산 신청
80~90년대 중국서 재도전
현재 농원 운영하며 '제2의 인생'
"인생도 사업도 우직해야 성공"


LA한인사회 올드타이머치고 그의 이름 석 자 모르는 이 없을 것이다. 이희덕(76)씨다. 현재 이글락에서 너서리를 운영하고 있지만 그는 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초반에 걸쳐 LA한인타운 건립을 주도해온 개척자로 주류사회까지 유명한 인물이다. 그 시절 톰 브래들리 전 LA시장이나 데이비드 커닝햄 시의원과도 막역한 사이였다 하니 구구절절 설명 않아도 그의 이민 이력이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현재 이글락에서 '에코가든' 너서리를 운영하고 있는 그를 이른 아침 그의 농원에서 만나봤다. 굳은 살 박이고 곳곳에 검은 흙이 묻은 그의 주름 깊은 손은 그가 울며 웃으며 지나온 세월을 고스란히 보여주고 있었다.

#코리언 빌리지를 꿈꾸다

그의 이민이력은 좀 특이하다. 충남 공주 출신인 그는 24세에 파견 광부로 서독에 가 3년여를 보내고 그곳에서 간호사였던 아내와 결혼, 1968년 다시 LA로 건너왔다. 이민 후 용접공으로 일하면서 모은 7000달러에 은행융자 보태 1970년 올림픽 길에 있던 일본인이 운영하던 마켓을 구입, 올림픽마켓이라는 간판 내걸고 장사라는 걸 처음 시작했다.



미국 내 이민역사를 연구하는 사회학자들은 이 올림픽마켓이 바로 LA코리아타운의 시초라 설명한다. 그의 가게 한쪽엔 늘 지인을 찾는 쪽지가 나붙었고 이산가족 상봉에 버금가는 눈물겨운 상봉을 심심찮게 볼 수 있었다. 처음엔 장사가 신통치 않았지만 얼마안가 한인들의 유입이 급속도로 늘어나면서 그의 비즈니스도 번창해갔다. 오픈 초반 월 매상이 7000달러 안팎이던 것이 3년이 지나면서 30만 달러 가까이 뛰어올랐다. 덕분에 세 들어 있던 건물도 사고 1975년엔 올드타이머들에겐 한인타운 상징과도 같은 한식당 '영빈관'을 올림픽 길에 오픈하기에 이른다.

"돈을 벌면서 LA한인타운을 제대로 만들어 보자 생각했죠. 미국 주요도시마다 차이나타운은 많았지만 한인타운이란 없었으니까요. 일단은 제대로 된 건축물을 지어 한인타운 개발의 첫 삽을 뜨고 싶었어요."

그래서 그는 한국에 가 직접 청기와를 공수해 왔고 단청 장인들까지 초빙해 영빈관을 오픈했다. 한국적 문화와 정서를 담은 영빈관으로 인해 그는 LA타임스를 비롯 주류사회 유명 언론에 대서특필되면서 한인타운 건설을 주도하는 파이오니어로 유명세를 떨쳤다. 이후 그는 70년대 후반부터 80년대 초반까지 코리아타운번영회 회장 등 크고 작은 감투를 쓰고 LA시의회와 긴밀한 관계를 맺어 샌타모니카 프리웨이 선상 노먼디 출구 인근에 코리아타운이라는 사인판 설치를 비롯 한국의 날 행사 개최, 서울국제공원(당시 파고다 공원), 8가 파출소 건립에 이르기까지 LA한인타운 발전을 위해 동분서주했다.

#7전8기 오뚝이 인생

영빈관 오픈 후 그는 올림픽과 노먼디 인근 5블록을 사들여 '코리언 빌리지'라 그가 명명한 코리아타운 개발에 본격적으로 착수했다. 코리언 빌리지 1차 프로젝트는 VIP플라자 건립이었는데 1979년 완공과 동시에 40여 곳의 입주업체가 들어설 만큼 성공적으로 끝났다. 그 여세를 몰아 2차 프로젝트로 진행한 것이 바로 VIP호텔 건립. 영빈관 인근 아파트 6채를 사들여 착공했지만 곧 공사를 중단해야만 했다. 당시 9%였던 은행이자가 23%까지 뛰어오면서 재정적 위기를 맞은 것이다. 설상가상 VIP플라자 입주자들이 렌트비를 내지 않는 상황이 장기화되면서 그의 자금 상황은 악화될대로 악화됐다. 매달 3만 달러가 넘는 은행이자와 600만 달러가 넘는 손실 끝 결국 그는 1982년 모든 부동산을 모두 처분하고 파산신청을 하기에 이른다. 그 후 사업을 정리하고 1986년 중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그 뒤 10여년을 중국에서 백두산 개발 프로젝트 등 굵직굵직한 사업을 진행하다 LA로 돌아와 다시 사업을 시작했다. 그 중 하나가 2008년엔 웨스턴 길에 오픈한 '이화장'. 이화장은 종업원이 50여명이 넘는 큰 식당이었지만 경영난으로 1년도 채 못돼 문을 닫았다. 그러다 2010년 그가 심기일전 다시 시작한 사업이 바로 지금의 농원이다.

"사업도 인생도 요령이란 없는 것 같아요. 그저 우직하게 일하는 이들에게만 성공이 따라오죠. 그렇다고 계속 흥할 수만은 없는데 망하면 다시 일어서면 되요. 옛 영화에 사로잡혀 있지 말고 겸손한 마음으로 다시 시작하면 또 일어설 수 있으니까요. 요즘 사람들은 빨리 성공하려고 요행을 찾는데 이 나이까지 살아보니 그런 건 없더라고요.(웃음)"

#꽃과 나무에서 찾은 행복

현재 그는 6년째 농원을 운영하고 있다. 처음엔 에코파크에서 개업했다 비즈니스가 잘돼 현재의 4만 스퀘어피트 규모의 너서리로 확장이전한 지 3년째다.

"집 마당에도 100여 그루의 나무가 있을 정도로 나무며 꽃을 좋아해요. 사업실패 후 여생동안 좋아하는 일을 해야겠다는 생각에 본격적으로 화훼 공부를 시작해 이 비즈니스를 하게 됐죠."

물론 농원 사업이란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오전 7시에 출근해 오후 7시에 퇴근하는, 꼬박 하루 12시간의 노동이 일흔이 넘은 그에게 쉬울 리 만무다. 그러나 그는 이제는 자식 같은 꽃과 나무를 돌보고 또 이를 좋아하는 고객들과 함께 수다 떠는 게 즐겁고 행복하다고 한다. 그러나 그는 일부러 한인타운을 찾거나 옛 지인을 수소문 하지는 않는다고 한다. 아직도 그에겐 어쩔 수 없는 오래된 상처가, 아픔이 남아 있는 듯도 했다. 그러나 그는 지난 과거에 대해 어떤 후회도 없다고 잘라 말한다.

"큰돈을 날렸지만 그게 동포들의 터전인 한인타운이어서 후회 없어요. 그것을 밑거름으로 꽃이 피고 열매가 맺혔으니까요. 올드타이머는 죽지 않아요. 다만 사라질 뿐이죠.(웃음)"

그는 푸시킨의 시를 제일 좋아한다고 했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슬픔의 날을 참고 견디면/기쁨의 날이 오리니/(중략)/모든 것은 순간이고/ 또 지나간 것은 그리워지느니.

아마 지금쯤 그는 기쁨과 슬픔의 모든 날들을 지나 마침내 그 모든 것을 그리워하는 관조의 시간 어디쯤을 천천히 산책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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