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별 뉴스를 확인하세요.

많이 본 뉴스

광고닫기

기사공유

  • 페이스북
  • 트위터
  • 카카오톡
  • 카카오스토리
  • 네이버
  • 공유

66세에 로펌 관두고 미국 유학, 73세에 물리학박사 땄다



'배움에는 늦음이 없다'는 말을 인생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있다. 한국에서는 잘 나가는 변호사였다. 서울지방법원장 출신으로 대형 로펌에서 고액 연봉을 받았다. 명예롭게 은퇴한 후엔, 편안한 노후를 맞이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소년 시절 품었던 물리학자의 꿈은 환갑이 넘어도 버릴 수가 없었다. 2009년, 그는 과감히 '가지 않은 길'을 택했다. 물리학 박사가 되기 위해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그의 나이 66세였다. 만학도의 당찬 도전은 7년 만에 결실을 맺었다. 지난 14일 UC머시드에서 물리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19세에 품었던 꿈을 54년이 지나서야 되찾은 강봉수 박사(73)의 얘기다.



강 박사는 성공한 법관이었다.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하고 사법시험(6회)에 합격해 1972년 대구지법을 시작으로 28년간 판사로 일했다. 제주지방법원장.인천지방법원장에 이어 2000년 서울중앙지방법원장을 끝으로 퇴임해 법무법인 태평양에서 고문 변호사로 9년간 일했다.



강 박사를 만나기까지 꼬박 두 달이 걸렸다. 강 박사는 인터뷰 요청을 할 때마다 "신문에 날 게 아니다. 대단한 일을 한 게 아닌데"라며 거절했었다. 간절한 메시지를 담아 세 차례 이메일을 보내고나서야 강 박사는 인터뷰에 응했다. 지난 20일, UC머시드 캠퍼스에서 강 박사를 직접 만나봤다.



-박사 학위를 받은 소감은.

"함께 입학한 동기 6명 중 제일 오래 걸렸다. 끝까지 쉽지 않았는데 잘 마무리돼 다행이다. 미국에서는 졸업식을 'Commencement(시작)'라 부른다. 이제 다시 시작할 때가 온 것 같다."

-박사 논문은 어떤 내용인가.

"전자파에 관한 것이다. 전자파를 한 곳에 집중시키면 강도가 세지면서 수평으로 움직인다. 그렇게 초점화(焦點化)된 전자파의 형태와 모양을 관찰하고, 그것을 입자가속기 등에 어떻게 응용할 수 있는가를 연구했다."

-뒤늦게 공부하기가 어려웠을 것 같다.

"유학와서 접한 물리학 이론들이 거의 외계어 수준이었다. 영어도 안 되고 첫 학기엔 수업을 거의 알아듣지 못해 강의 시간엔 어디까지 진도를 나갔는지만 확인했다. 집에 돌아와 참고도서 찾아보며 이해될 때까지 하루 15시간씩 매달렸다."

-원래 '공부머리'가 좋은가보다.

"공부머리보다는 시험운이 좋은 편이었는데 그것도 나이 앞엔 어쩔 수 없더라. 시험 직전까지 달달 외웠는데도, 시험지를 딱 펼치면 용어고 공식이고 도무지 생각이 안 났다. 처음엔 시험점수도 형편 없었는데, 그래도 늘 커트라인은 가까스로 통과했다.(웃음)"

-포기했던 꿈이라고 들었다.

"고3때까지 물리학과를 마음에 두고 있었는데, 화학 선생님이었던 아버지가 갑자기 '법대를 가라'고 하셨다. 그때만 해도 부모님 말씀이 하늘같던 때였고, 나보다 세상을 오래 산 분이니 다 뜻이 있지 않을까 싶어 따랐다."

-왜 굳이 어려운 길을 택했나.

"로펌 일은 별로 적성에 맞지 않았다. 그러다 우연히 교보문고에 들렀는데 그날따라 과학책 코너에 눈이 가더라. 기하학 책을 한 권 펼쳤더니 신기하게도 고등학교 때 느꼈던 호기심이 다시 샘솟는 걸 느꼈다. 공무원 연금만으로 충분히 살 수 있는 지금이 하고 싶던 일에 도전할 때가 아닌가 생각했다."

-다시 공부를 하니 좋은가.

"좋다. 힘들지만 모르던 걸 하나씩 알아갈 때의 성취감은 대단하다. '아이고 이 어려운 게 해결이 되는구나' 싶으면 얼마나 기쁜지."

-나이 때문에 유학생활에 불편한 점은 없었나.

"미국에선 아무도 나이를 묻지 않는다. 그러다보니 나도 나이를 자연스럽게 잊게 되더라. 고등학교 때 하던 공부를 이어서 하고 있으니 마음도 그 시절로 돌아간 것 같다. 그래도 너무 늙은이처럼 보이면 안 될 것 같아 한국에선 하지 않던 염색도 하고, 운동화만 신고 다녔다. 청바지도 입어 봤는데, 그건 불편해서 못입겠더라."

-건강은 괜찮은지.

"규칙적인 생활을 한다. 오후 10시쯤 자고, 새벽 1~2시에 잠이 깨 다시 두세 시간 공부하고, 한두 시간 더 잔 후 7시에 일어나 등교하는 생활을 7년간 반복했다. 매일 조깅도 거르지 않았다. 그 덕분인지 큰 문제는 없다. 스트레스를 받을 땐 중학교때부터 배운 클래식 기타를 쳤다. 밥 먹고 소화도 시킬 겸 30분씩 쳤는데 가끔 30분을 넘기면 아내한테 '빨리 공부하라'고 혼나기도 했다.(웃음)"

-은퇴 후의 삶을 고민하는 사람이 많다.

"경제적인 문제가 어느 정도 해결된다면 학창시절을 떠올려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러면 내가 무엇을 좋아했는지, 꿈이 뭐였는지 기억이 난다. 할 것이 정해지면 과감히 뛰어들어보는 거다. 나이가 들면 신경 쓸 게 별로 없어 하나에 정진하기가 더 쉽다."

강봉수 박사는 앞으로 1~2년간 '볼런티어(Volunteer) 연구원' 신분으로] UC머시드에서 공부할 계획이다. 볼런티어 연구원은 포스트 닥터(박사 후) 과정과 비슷하지만, 보수를 받지 않고 개인 연구에만 집중할 수 있다. 그는 "일자리는 젊은 사람들에게 양보하고 난 내 공부에만 전념하겠다"고 했다.

"아직도 공부할 게 많냐"고 했더니 긴 답이 돌아왔다. "물리학은 '세계가 어떤 원리로 움직이는가'라는 질문에 답을 찾는 학문이다. 이미 기라성같은 학자들이 많은 걸 알아냈지만, 깊이 들어갈수록 아직 밝혀지지 않은 게 많다. 기왕 공부를 시작했으니 인간이 모르는 영역을 조금이라도 줄이는 데 공헌하고 싶다. 마음이 급하다."


오세진 기자



Log in to Twitter or Facebook account to connect
with the Korea JoongAng Daily
help-image Social comment?
lock icon

To write comments, please log in to one of the accounts.

Standards Board Policy (0/250자)


많이 본 뉴스





실시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