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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창] '훔친 말씀'은 생명이 없다

이종호/OC본부장

# 조선시대는 글이 곧 시(詩)요 시는 곧 입신양명의 통로였다. 시는 또한 사대부 사회의 지적 풍류이자 더불어 어울리기 위한 오락이기도 했다. 그런 만큼 글 잘 쓰고 시 잘 짓는 것은 모든 사대부들의 꿈이었다. 그만큼 부담도 커서 선비들은 끊임없이 표절의 유혹과 싸워야 했다.

강원대 김풍기 교수는 '한시의 품격'이란 책에서 조선 선비들의 표절도 요즘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다고 주장한다. 책에 따르면 얼굴 화장을 하듯 기존 글을 덧칠하는 장점(粧點) 기존 작품의 생각과 표현법을 차용해 새 작품을 만드는 환골탈태법 선인의 시문을 도용한 뒤 글자만 슬쩍 바꿔 마치 자신의 것인 양 내놓는 도습(蹈襲) 등은 창작과 표절 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줄타기했던 조선 선비들의 흔한 글쓰기 수법이었다.

노골적으로 남의 작품을 자신의 것처럼 내놓은 경우도 있었다.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유영경(1550~1608)이 대표적이다(그는 영창대군을 세자로 옹립하려 했다가 실패하고 선조의 뒤를 이은 광해군 때 유배되어 사약을 받았다). 유영경은 중국 사신들로부터 동방 최고의 문장가로 칭송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알고 보니 그의 시는 모두 최립이라는 당대 최고 문장가의 대작(代作)이었다는 것이다. 최립(1539~1612)은 명나라에 수차례 사신으로 다녀오면서 중국 문장가들과 교류했을 정도로 글재주가 뛰어났지만 윗사람의 지시에 따라 어쩔 수 없이 대필을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김 교수는 쓰고 있다.

이런 사례들을 보면 좋은 글에 대한 욕망은 예나 지금이나 똑같았던 것 같다. 뿐만 아니라 욕망과 능력의 괴리에서 괴로워하다 결국 표절이라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도 고금동서가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 어느 시대 어떤 사회에서나 표절은 도둑질로 취급됐고 용서받기 힘든 비난과 지탄의 대상이었다. 요즘은 저작권 개념까지 더해져 법적 문제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게 됐다. 그럼에도 표절이 근절되지 않는 이유는 우리 사회가 표절에 대해 너무 둔감해졌고 처벌 또한 솜방망이에 머물러 있다는데 있다. 유명 작가나 연예인 정치인 대학교수 등 표절로 곤욕을 치렀던 사람들이 한바탕 여론의 폭풍우만 지나면 아무 일 없었던 듯 버젓이 활동을 재개하는 것도 그래서일 것이다.

최근엔 한 기독교 인터넷 매체가 보도한 LA 유명 교회 담임목사의 표절 설교가 한인사회의 논란이 되고 있다. 보도에 따르면 해당 목사는 당시 너무 바쁘고 심신이 피곤해 어쩔 수 없이 그렇게 했다고 한다. 그래도 결론 부분은 다르다는 항변 아닌 항변을 했다고 하는데 글쎄다. 그렇게 치면 핑계 없는 잘못이 어디에 있을까. 배 고프고 돈 없으면 도둑질을 해도 상관없다는 논리와 무엇이 다를까.

우리가 끊임없이 표절을 문제 삼는 것은 그것이 개인의 양심 문제를 넘어 공동체를 지켜가는 기본 원칙을 무너뜨리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표절이 일상화된 사람은 그것이 도둑질이라는 것조차 느끼지 못한다. 뿐만 아니라 다른 영역에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불의를 저지를 가능성이 농후하다는 것도 여러 사례를 통해 입증이 되고 있다. 단 한 번 일지언정 많은 이들의 정신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종교 지도자의 표절을 가벼이 넘길 수 없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교회는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세상을 위해 늘 기도한다. 그렇다면 먼저 교회 안에서부터 정의가 실현되어야 한다. 아니 그러려는 노력이라도 있어야 한다. 아무리 좋은 말씀도 '훔친' 말씀이라면 생명이 없다. 불의를 묵인하고 방관하는 교회가 어떻게 세상의 정의를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세상 모든 종교는 사랑과 용서를 이야기하지만 불의한 자까지 보듬어야 한다는 가르침은 어떤 종교에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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