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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창] 안 되면 조상 탓, 잘 되면 내 탓

[LA중앙일보] 발행 2016/06/17 미주판 10면 기사입력 2016/06/16 22:12

이종호/OC본부장

# 우리 조상들은 산이나 땅 모양, 물의 흐름 등 거하는 자연 공간의 위치에 따라 인간의 길흉화복도 영향을 받는다고 믿었다. 각 왕조의 도읍지 선정에서부터 일반 백성들의 묘지나 집터까지 유달리 명당을 따졌던 것이 그 증거다. 이름하여 풍수지리 사상이다.

풍수지리와 관련해 널리 알려진 이야기는 조선 개국 직후의 천도(遷都) 논쟁이다. 태조 이성계는 건국 후 가장 먼저 도읍지 옮기는 것부터 생각했다. 고려 수도였던 개성은 땅기운이 쇠하여 더 이상 도읍지로 적합지 않다고 여긴 것이다. 새 도읍지로 처음 거론된 곳은 당대 최고 풍수가로 꼽히던 권중화가 추천한 계룡산 일대였다. 그러나 훗날 태종이 된 이방원의 심복이었던 하륜의 반대에 부딪쳐 곧바로 취소됐다. 대신 하륜은 지금의 연희동, 신촌 일대인 무악을 천거했다. 하지만 최종 도읍지는 결국 정도전과 무학대사가 밀었던 한양(현 경복궁 일대)으로 낙점이 됐다.

천도 작업의 주인공은 사실상 조선 건국의 기획·연출자였던 정도전이었다. 경복궁의 주요 전각을 비롯해 서울 사대문 이름을 모두 그가 지었다. 하지만 종묘·사직·궁궐·도로 등 수도 한양의 기본적인 공간 배치는 권중화의 작품이었다는 것이 풍수전문가 김두규 우석대 교수의 주장이다(2016년 해냄출판사 발행 '국운풍수'). 관악산 화기(火氣)를 피하기 위해 광화문에서 숭례문까지의 길을 일직선이 아니라 약간 비틀어 만든 것, 숭례문 현판을 세로로 세워놓은 것 등이 모두 권중화의 풍수관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어쨌든 조선은 철저히 풍수 사상에 입각해 도읍을 정했고 궁궐을 지었다. 훗날의 왕실 무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그렇게 살피고 고른 땅이었지만 조선 500년 내내 왕실에 우환 그칠 날이 없었던 것을 보면 풍수사상 자체가 그렇게 신빙성이 있어 보이지는 않는다. 아니면 정말 명당을 고르지 못했거나. (하륜은 적장자 상속 질서가 자리 잡기 힘든 터라는 이유로 한양을 반대했다. 훗날 조선 왕 27명 중 정실 왕비의 큰아들이 보위에 오른 경우는 8명뿐이었고 그것도 문종·단종·연산군·인종·경종 등 일찍 죽거나 전쟁, 폐위 등의 수난을 당한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륜의 풍수가 한 수 위였음을 짐작케하는 대목이다.)

# 최근 김무성 전 새누리당 대표가 서울 우이동에 있던 선친 묘를 선친의 고향인 경남 함양으로 이장했다고 한다. 북한산 개발로 우이동 묘소가 명당의 조건을 잃었다는 것이 이유다. 새로 옮긴 곳은 "다섯 개의 안산이 앞에 있고 뒤로는 지리산이 기운을 모아주는 길지"라고 한다. 또 명당에서만 나온다는 오색토가 출토됐다며 '큰 인물'의 출현을 기대한다는 이야기도 현지에선 나돌고 있다고 기사는 전한다.

하긴 김대중 전 대통령도 1997년 대선 2년 전 전남 신안군에 있던 부모 묘소를 경기도 용인으로 옮겼었다. 경우가 다르긴 하지만 유력한 대선 후보였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도 연거푸 낙선한 후 조상 묘 일부를 전북 순창으로 이장했다고 한다.

이왕이면 좋은 터에 조상을 모시고 싶은 마음, 이해는 한다. 후손된 입장에서 조상의 음덕을 조금이라도 입어보고 싶은 것이 인지상정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요즘 같은 과학문명 시대에 정치인들까지 '큰 인물' 운운하며 풍수에 매달린다는 것은 왠지 구차해 보인다. 사람이 잘되고 못되는 것은 풍수보다는 타고난 명(命)과 운(運)에 달렸고, 그런 운명까지도 바꾸는 것이 적덕공부(積德工夫, 베풀어 덕을 쌓고 마음을 열어 끊임없이 배우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도전도 나라가 잘 되고 못 되고는 사람에게 달렸지 지리의 성쇠에 좌우되는 것이 아니라고 했다. 정치인이든 누구든 불확실한 풍수나 애꿎은 조상 탓 하기 전에 자신의 부족함부터 살피는 것이 더 먼저일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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