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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기고 싶은 이야기

[뉴욕 중앙일보] 발행 2006/11/17 미주판 5면 기사입력 2006/11/16 16:48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 (컷)



뉴욕중앙일보는 한인사회 원로들의 이민생활을 찾아가는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을 다시 시작합니다.

미주 한인 이민 100주년 특별기획으로 2002년 시작된 '남기고 싶은 이야기들'은 그동안 홍종학 한미부동산 대표 윤여태 저지시티 미상인연합회장 김영만 미한국상공회의소 명예회장 등의 이민 생활을 연재해 왔습니다. 동포사회 원로들의 삶을 통해 고난과 역경을 딛고 일어선 불굴의 의지를 평가하는 한편 건강한 이민사회 건설을 위한 제언 등을 담고 있습니다. 편집자 주



제4화

외길 봉사 우리들의 큰 언니



홍인숙

퀸즈YWCA 고문총무



〈1>새로운 시작과 도전



수줍던 여대생 봉사활동가로 변신

선배 충고로 드루대 신학 다시 공부



플러싱 파슨스블러바드에 있는 퀸즈YWCA를 가면 매일 아침 빗자루를 들고 마당을 청소하는 여성이 있다. 화장기없는 얼굴에 짧은 커트 머리를 한 홍인숙(62) 고문총무다. 1978년부터 시작한 빗자루질이 올해 28년째다. 그는 한인사회 이웃 섬기기 외길 인생을 걷고 있는 대표적인 한인 여성이다. 결혼도 마다했다. 어쩌다 혼기를 놓친 것이 아니라 봉사활동에 푹 빠져 살다보니 그렇게 된 것이다.

한인 여성들의 권익 향상과 청소년들의 대모 역할을 위해 혼신의 힘을 바쳤다. 70년대 맞벌이 부부를 위해 무료 방과후 학교 프로그램을 처음 만들었고 10대 탈선 청소년을 선도하는 교육과 취업 프로그램을 선보였다. 노년층의 여가선용을 위한 노인교실도 열었다.

"내 인생은 YWCA를 빼놓고는 어느 한 대목도 얘기할 수 없다"는 홍 고문총무. YWCA와 평생을 부대끼면서 한인사회 희노애락을 함께 하며 살아온 홍 고문총무의 이민생활을 들어본다.



1971년 12월14일 뉴욕에 도착했다. 엊그제 같은데 뒤돌아보니 35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김포공항을 떠날 땐 미국에서 공부를 마치고 다시 한국으로 돌아갈 마음이었는데…. 이제 뉴욕은 제2의 고향이 되고 말았다. 미국 생활 가운데 28년을 YWCA와 보냈다. YWCA의 지난 날을 되돌아 보니 많은 생각들이 주마등 처럼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1978년 창립한 YWCA를 이야기하자면 뉴욕 한인사회 작게는 플러싱 한인사회 변천사를 훑고 지나가지 않을 수 없다.

나와 YWCA의 인연은 대학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연세대학 신학과를 다니면서 교내 기독학생 단체 SCA(YM/YWCA학생운동) 회원으로 여름 겨울방학을 이용해 농어촌 봉사활동에 참여했다.

수줍음도 많고 남들 앞에 나서지도 못하는 내성적인 성격이라 봉사활동과는 인연이 없는 줄 알았다. 그러나 막상 봉사활동에 참여해 보니 나도 모르게 적극적인 모습을 발견했다. 농어촌의 순수한 사람들이 나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봉사활동에 대한 열정이 생기면서 졸업 후 아예 농촌에 눌러 살까 하는 계획까지 세웠었다.

1967년 대학 졸업을 한달 가량 남겨 놓고 서울YWCA에서 일할 기회가 주어졌다. 이것이 평생 나의 일이 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당시 서울YWCA에서 일했던 부서는 지역활동부. 공장 여직공 버스 차장 여자 군인 윤락여성 서대문교도소 수감자 등 소외된 이들을 직접 찾아가 각종 프로그램을 소개하고 참여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주요 업무였다. 서울 외곽 지역에 10여개의 주부클럽을 조직해 매달 20여개 지역에 강사를 초빙 강연회를 준비하기도 했다. 그러나 왠지 나와는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어 미국에 갈 계획을 세우고 4년6개월만에 서울YWCA를 사임했다.

사임 후 YWCA 박순양 총무로부터 대구YWCA 총무직을 맡아달라는 요청을 받았다.

모든 면에서 부족하다고 생각한 나에게 중책을 맡기려는 박 총무의 의중이 뭘까 고민했다.

〈계속〉

정리=임은숙 기자

'총무직을 감당할 수 있는 능력이 있을까? 내게 총무의 자질이 있을까?' 내심 걱정도 많이 했다. 여러 번 거절하던 내게 박 총무는 미국 비자를 받을 때까지만 대전YWCA총무를 맡아달라고 부탁했다. 오랜 고민 끝에 미국에 가기 전까지만 일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2개월 정도 대전YWCA 총무로 일하면서 기관의 행정 능력 조직 운영 프로그램 계획 등 참으로 많은 것을 배웠다. 이것이 후일 미국에서 YWCA를 창립하고 운영하는데 적지 않은 도움이 됐다. 한참 후에 하나님께서 나에게 이 모든 훈련을 시키셨다는 것을 깨달았다.

1971년 11월 마침내 미국 비자가 나왔다. 대전 YWCA 총무를 사임하고 그해 12월14일 뉴욕행 비행기를 탔다. 사회복지학을 공부하고 한국으로 돌아간다는 계획이었지만 가족들은 미국에서 새 삶을 시작할 것을 제안했다.

병원 실험실 관련 공부를 마친 후 링컨병원 병리실에서 3년6개월간 일했다. 봉사단체에서만 일했던 내가 잠시 외도를 한 셈이다. 그러나 열심히 일한 덕분에 병원 부수퍼바이저로 승진했고 병원 일을 통해 미국 사회를 이해하고 배울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이 경험 또한 YWCA를 운영하는데 큰 도움이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박순양 총무가 미국 YWCA 회의에 왔다가 나를 찾았다.

"홍인숙씨 이렇게 편안하게 살려고 미국 온게야? 공부하고 한국YWCA에 와서 함께 일할 거라고 기대했는데…."

박 총무가 툭 던지고 간 말 한마디가 계속 머리 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결국 병원 일을 그만둔 후 다시 전공인 신학을 더 공부하기로 결정했다. 대학을 졸업한지 꼭 10년만이다.

1976년 뉴저지에 있는 드루(Drew)신학교에 입학했다. 석사 과정을 마치면 졸업과 동시에 한국YWCA로 가겠다고 마음도 굳게 먹었다.

이때 생각지도 않은 일이 생겼다. 플러싱에 있는 한인 이민가정에서 화재가 발생한 것이 내가 생각지도 않았던 한인YWCA를 창립한 동기가 됐다.

〈계속>

정리=임은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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