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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난 속에서 고통 받는 아이들 잊을 수 없었다"

여자 전사들: 거리의 천사 송정윤(중)

남가주대학교(USC)를 졸업한 후 알프레드는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군에 입대했다. 1941년 12월 7일(일본의 진주만 공격일)에 알프레드는 캘리포니아 출신의 한국 여성과 결혼했다. 그날은 공포에 휩싸인 날이었다. 다행히도 당시 내가 근무했던 미군 건물은 폭격을 당하지 않았기 때문에 나는 계속해서 일할 수가 있었다.

어느 날 알프레드의 엄마로서 본토로 가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주 명령은 하느님이 우리 가족에게 주신 선물이었던 셈이다. 신혼 생활에 첫 아이가 곧 태어날 알프레드의 가족과 함께 살게 되어 나는 무척 기뻤다. 나는 집에서 멀지 않은 봉제 공장에서 일하게 되었고 알프레드는 법대로 다시 진학했다. 아들 부부에게서 레슬리 로즈라는 건강한 딸이 태어났다. 알프레드는 이후 아들 마크가 태어난 해에 변호사 시험에 합격했다. 행복한 우리 가족에게 프랜시스라는 딸이 또 태어났다.

그때 우리는 몬터레이파크에 거주하고 있었다. 아이들이 성장하고 학교에 다닐 무렵 나는 먼저 저세상으로 떠난 아들 퍼시와 고아들을 마음속에 품으며 조국인 한국을 그리워하게 되었다. 한국전쟁이 끝났지만 조국은 분단국가가 되었다. 내가 1954년 7월 21일에 부산에 있는 이사벨 고아원으로 떠나면서 우리 가족은 이산가족이 되었다. 재닛과 남편인 황 선생님이 그곳에서 200명의 고아들과 여자아이들을 돌보고 있었다.

40년 만에 내가 떠났던 그곳에 다시 도착했다. 나는 고아원을 찾아갔고 그 곳에서의 생활이 내게는 큰 기쁨이었다.



서울 근교에 버디 홈이라는 아기들을 돌보는 곳이 신설되자 나는 그곳에서 아기들에게 먹일 우유를 준비하는 일을 돕는 자원봉사를 시작했다. 그곳에서는 열 명의 간호사들이 아기들을 미국으로 입양되기 전까지 돌보고 있었다. 아기들의 대부분은 혼혈이었다.

나는 세 명의 다른 여성들과 함께 8일 동안 기도를 드린 후 아들이 있는 미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한 지 2주 후인 1957년 11월 7일 나는 친구들을 만나기 위해 하와이로 떠났다. 손자 마크가 나에게 물었다. "왜 그렇게 오랫동안 떠나 있으셨어요?" 내가 그 아이에게 해줄 수 있는 말은 오직 이뿐이었다. "나도 너를 무척 그리워했단다. 그러나 하느님께서 내게 한국으로 돌아가 춥고 배고프고 거리에서 구걸하는 불쌍한 어린아이들을 돌보라고 하시는구나."

내 손자 손녀들이 음식을 갖고 불평하는 것을 보면서 거리의 아이들이 떠올랐고 그것은 나에게 큰 근심이 되었다. 가난 속에서 고통을 받고 있는 아이들과 대조적으로 풍요한 조건에서 자라나고 있는 나의 손자 손녀들이 조그만 것을 두고 불평하고 싸우는 모습이 안타까웠다. 1959년 1월 10일 오전 5시에 기도 중에 있던 나는 밖에서 폭우가 쏟아지는 소리를 들었다. "하느님 내가 한국에 가서 아이들에게 먹을 것을 주지 못한다면 무엇을 할 수 있겠습니까? 어떤 교회나 선교 집단도 저에게 도움을 주지 않습니다. 그들은 내가 너무 늙었고 교육도 받지 못해 선교사로 활동할 수 없다고 합니다."

할렐루야! 하느님의 답이 들렸다. "왜 걱정하느냐? 그 일은 내 일이다. 가라. 내가 너를 보살필 것이고 너의 일을 도울 것이다. 내가 한다. 그렇게 될 것이다." 하느님이 나와 함께해주시겠다는 약속이었다. 그분은 우리의 모든 약점과 강점을 잘 알고 있다. 나는 그를 믿는 신앙인이기 때문에 한국에 가야 한다.

며칠 후 일라 기브스로부터 나의 파트너가 되겠다는 편지를 받았다. 일라는 오랫동안 심장 질환을 앓고 있었고 하루 14시간은 병석에 누워있어야 했다. 그녀는 내가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에 관한 보고서를 손수 타이프로 일일이 쳐서 친구들과 친지들에게 보내고 그들에게 지원을 요청하여 매달 나에게 지원금을 보냈다. 나는 그렇게 얻은 돈으로 서울에서 집 없는 아이들을 돌볼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렇게 하느님은 나와 함께 하셨다. 1959년부터 30년 동안 그녀는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내게 기부금을 보냈다.

1959년 2월 300파운드의 헌 옷과 800달러의 현금을 가지고 나는 인디언이라는 이름의 배에 올랐다. 한국에 도착해 꽤 한참 동안 시골을 돌아다니면서 소년들이 살기 좋은 장소를 물색했다. 드디어 나는 가나안 농부학교의 설립자인 김영기 장로를 만나 그가 제공해준 장소를 찾았다. 김영기 장로는 교회를 짓고 있었는데 교회 근처에 하느님의 가르침이 필요한 소년들에게 집을 마련해줄 수 있게 된 것이었다. 나는 급히 일라에게 내가 소지하고 있는 800달러에 추가로 400달러가 더 필요하다는 편지를 보냈다. 이마리 수녀님이 나에게 숙식을 무료로 제공해줘서 800달러는 저축할 수 있었다. 그 후 18년 동안 일라는 나에게 그녀가 모금할 수 있는 돈을 매달 부쳐주었다. 5월에는 사람을 시켜 배추 고추 무 옥수수 오이 감자 수박 등을 심을 수 있는 정원을 만들었고 비옥한 땅에서 모든 작물들이 무럭무럭 잘 자랐다.

나는 텐트에 살면서 아이들을 위해 음식을 준비했고 그들에게 진흙 집을 지어주었다. 대강 지은 집이었지만 거리에서 살던 가난한 아이들에게는 소중한 집이었다. 24년 동안 50명의 아이들을 보살필 수 있었다. 나는 미국 시민권자라서 재산을 소유할 수 없었기 때문에 목사님의 어린 아들 남해성을 믿을 수 있는 일꾼으로 두고 도움을 받았다. 그의 이름으로 건물을 사서 가나안 학교를 기독교 기관으로 등록을 마쳤다. 1959년 12월 20일에 네 명의 소년들이 모여 처음으로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냈다. 아이들은 나와 함께 성장했고 결혼해 아이들을 키우면서 살고 있다.

남해성이 거리에서 아이들을 더 데려왔고 우리는 김평 목사와 가족을 목사 사관에서 거주할 수 있도록 초빙했다. 김 목사님은 그곳에 사는 한편 자신의 교회에서 목회를 계속하면서 오전 6시와 오후 6시 우리를 위해 예배를 드렸다. 예배에서 미국 교회에서 부르는 찬송가를 한국어로 불렀다. 매일 성경을 가르쳤고 구절도 암송했다. 점차 아이들이 만월 학교에서 공부를 하기 시작했다. 나는 아이들과 함께 거주하다가 돈이 모이자 더 큰 집을 짓게 됐고 70명의 아이들이 함께 식사할 수 있는 강당도 마련했다.

1965년 크리스마스에 나는 아들 가족과 다시 만나기 위해 로스앤젤레스로 날아갔다. 3개월 동안 로스앤젤레스에 머물면서 우리의 가족들을 진심으로 지원해준 일라의 친구들과 친지들을 만났다. 가장 황홀했던 순간은 41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캔자스주의 맨해튼에 살고 있는 프랜시스 태더셀을 만났던 때이다.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천국이 이처럼 흥분되고 황홀할까 하고 생각할 정도였다. 나는 고마움에 눈물을 하염없이 흘렸다. 프랜시스는 하녀로 일하며 한 달에 고작 61달러를 벌고 있었는데 50달러를 한국의 조니(이 세상을 떠난 그녀의 남편 이름)를 위해 보낸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아름답게 눈으로 덮인 로키산맥이 있는 콜로라도 주의 덴버와 글랜우드 스프링스로 떠났다.

3개월 후 나는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 가나안 학교에는 배병철 담임 목사가 새로 부임했다. 아이들은 열심히 공부했고 이제 중학교에 진학할 나이가 되었다. 하지만 학교는 너무 멀리 떨어져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곳에 중학교를 세우기로 했다. 1970년 3월 18일에 7학년 교실을 예배당에 열었고 정윤중학교라고 이름을 지어 근처의 가난한 아이들을 학생으로 받았다. 남해성이 교장이 되었고 자원봉사자들이 교사가 되어 70명의 졸업생을 배출했다.

일리노이 주 휘튼의 팀 선교회에서 온 리처드와 줄리아 한 선교사 부부가 학생들에게 학교 건물을 짓는 법을 가르쳤다. 진흙 벽돌을 태양에 말려 학생들이 운반했다. 어떤 학생들은 머리에 올리고 가슴에 받치거나 등 뒤에 올려 놓고 벽돌을 운반했다. 학생들이 즐겁게 노래하면서 열심히 진흙 벽돌을 운반하는 것을 보며 나는 정말 행복했다. 하느님도 이것을 보시면 행복하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학생들에게는 이것이 유일하게 중학교를 다닐 수 있는 기회였다. 1973년에 첫 번째 졸업생이 탄생했을 때 처음으로 세 개의 교실을 신축했다. 우리 학교의 신조는 잠언 1장 7절 "하느님을 아는 것이 지혜의 첫걸음이다"였다.

1974년 1월 일라의 심장이 급속히 쇠약해져 생명이 위독하다는 편지를 받았다. 그해 8월 일라의 딸이 더 이상 가망이 없더라도 로스앤젤레스의 한 의사가 수술을 시도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는 편지를 보냈다. 우리 학교의 전교생이 일라의 쾌유를 위해 기도했다. 우리 학교는 그녀로부터의 재정적 지원이 절실히 필요하기도 했다. 정말로 하느님이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주비 에트 박사가 그녀의 심장에 있는 세 개의 밸브를 두 개의 돼지 밸브와 한 개의 플라스틱 밸브로 교체하는데 성공했다. 기적이 이루어졌다.

이경원 저·장태한 역
'외로운 여정'에서 전재
정리= 장병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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