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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부문/가작] 나무들, 짐승들

안혜원

수천, 수만 개의 몸을 붙이고 빽빽하게 서 있는 침엽수림이다. 밤이 내리면 나무들의 정령들이 길쭉한 눈을 뜬다. 연기같이, 꿈틀거리면서 진녹색의 비현실적인 덩어리를 피워올린다. 언뜻, 옆으로 치켜뜬 눈동자를 본 것도 같다. 어둠 안에, 수많은 이파리들 안에 그 휘어감는 팔들을 뻣어와 허리를, 목을, 어깨를 낚아챈다. 서걱이며 부딪는 가지와 나뭇잎과 바람의 소리들, 하늘을 가득히 채우는 수많은 원한의 소리들.

조용하게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진한 파랑에서 검게 넘어가는 하늘과-하늘이 확 머리 위로 떨어져 내릴 듯이 몰려왔다.- 흔들리며 술렁대는 나뭇잎들과 바람, 그리고 끓어 넘치고 있는 뜨거운 땅속의 물들이 솟아올라 머리들을 맞대고 있는 작은 호수들에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나는 오랫동안 밤과 물들을 보고 있었다.
이제 공원은 문을 닫을 시간이 되어 있었다. 나는 천천히 다갈색의 나무들로 잇닿은 다리들처럼 만든 길을 걸어 돌아가기 시작했다. 멀리 고즈넉하고 운치 있는 호텔의 모습이 보였다. 공원 안에 있는 단 하나의 호텔은 박제된 무스의 얼굴이 양쪽 천장에 달려있고 산장의 야생적이면서 편안한 인테리어가 마음을 푸근하게 해 주는 곳이었다. 그리고 그와 내가 함께 차를 마시면서 음악을 듣던 로비의 그 바가 인테리어도 바뀌지 않고 그대로 있었다.

이틀 전 이곳으로 떠나오기 전에 차에 기름을 가득 넣고 내가 좋아하는 하와이에서 산 서핑 보드가 그려진 빨간색 작은 이름표가 달린 은색 수트 케이스를 트렁크에 넣고 하얀 집의 벽돌들과 밝은 갈색의 지붕, 유럽의 어느 골목의 테라스처럼 꾸며진 작은 화분들이 놓여있는 테라스를 잠시 바라보았었다.
나는 차를 타고 깨끗한 흰 도로를 질주할 것이다.


1000마일이 넘는 길이다. 나는 혼자서 그 길을 달려 땅속에서 안타깝게 끓어 올라오는 뜨겁고 푸르른 물들을 보러 갈 것이다. 그리고 나무들을, 버펄로와 사슴과 곰과 새들을…
차에 올라타기 전에 전화를 건다. 너무나 귀에 익은 목소리. 열정도 울림도 없는 목소리가 전화를 받는다. 나야. 하는 내 목소리에도 아무런 울림이 없다. 갑자기 폐쇄된 동굴 속에라도 있는 듯한 막막하고 쓸쓸한 느낌에 사로잡힌다. 지금 떠나려고. 그가 담담하게 대답한다. 그래.
잠시 1,2 초의 어둠 같은 침묵. 그리고 마지막처럼 그의 한숨소리가 들린다. 잘 다녀와라. 그는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알고 있다. 나는 그가 알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차에 올라타고 왼쪽 사이드 미러를 살짝 쳐다보았을 때 또 전화가 울린다.
나 영은이. 응. 너 정말 그냥 바람쐬러 가는 거 맞아?
영은이도 알고 있다.
그렇다니까.
넌 진아를 데리고 가는 것 같아. 진아 때문에 가는 거지.
나 때문이야.
헤인아, 네가 돌아오면 할 말이 있어.
그래 갔다와서 얘기하자.
나는 시동을 걸었다. 나의 검은색 ML 350 는 세차를 해서 오전의 환한 햇빛 속에 깨끗하게 반짝였다. 그 반짝임이 익숙한 우리 골목을 빠져 나와 큰길로 나갈 때까지 눈꺼풀 안쪽, 어쩌면 상상의 영역인 눈 속의 어둠 안에서 따라왔다. 맑고, 하늘이 너무나 파란 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우회전으로 프리웨이 진입로로 들어섰다. 좌우로 펼쳐진 나무들이 내 차를 따라왔다.
진아의 얼굴이 나무들 위로 떠올랐다. 나는 그 애가 나를 따라올 것을 알고 있었다. 긴 여정, 지나가는 내 자동차 바퀴에 새겨지는 새로운 길을 따라 나를 따라오리라는 것을.

진아는 너무나 살이 쪄서 정신이 이상해 보였다. 고등학교 2학년 때였다. 스트레스 때문에 머리를 흐트러뜨리고 아무것도 못 본 것처럼 앞만 보고 걸어가는 진아를 아이들은 지지나라고 불렀다. 아니 표기할 때 그랬다. 우리들의 조그만 쪽지에 재수없다는 말과 함께 쓰여질 때 그랬다. 조그만 눈, 큰 키. 곱슬거리는 머리와 귀여운 입술. 입술을 빼면 그 앤 그다지 눈에 띄지 않는 평범한 얼굴이다. 웃을 때는 작은 눈이 반달 모양으로 없어진다. 그 눈으로 웃으며 간지럼을 태우고 낄낄 웃어대고 애교를 부리던 몸짓들… 이마에 내려오는 곱슬머리가 아무렇게나 늘어진 채로 그 애는 무엇엔가 몹시 성이 난 듯, 정신이 다른 세상에 가 있는 듯 쾅쾅거리는 걸음으로 걸어간다. 몇몇 아이들이 부르지만 듣지 못한다. 오후 내내 어려운 수학 문제와 싸우다가 지칠 대로 지친 것 같다. 몸만 도서관에 앉아 있지 하루종일 릴케만 읽다가 온 나와는 다르다. 아무도 그 애와 이제 대화를 하지 않는다. 목욕탕에서 지지나를 만났는데 아는 척도 하지않고 너무나 급하게 옷만 갈아입고 가 버리더라고 은정이가 말해준다. 약간 머리를 기울이고 -다운 신드롬이 있는 아이와 비슷한 몸짓이다.-걸어가는 진아는 언제인가 함께 간 대의원 수련회에서 내 손을 잡고 내 어깨에 기대고 울었다.
내가 왜 인형을 그렇게 좋아하는지 아니. 그 애는 그때도 나와 함께 학교 앞 선물가게에서 샀던 분홍색 곰돌이를 안고 있었다. 선물가게에서 까만 플라스틱 눈동자를 자꾸만 들여다 보던 진아는 흥분된 목소리로 ‘바로 이 애야.’ 하고 말하면서 스무개도 더 되는 똑같은 테디베어들 사이에서 곰돌이를 집어들어 꽉 안았다. 고등학교 2학년의 그 애는 여섯 살 짜리 같이 포근한 인형의 핑크색 털에 뺨을 비벼댔다. 그 애가 곰돌이라고 부르는 그 인형의 털은 바래서 허옇게 되어있었다. 너무 자주 목욕을 시켜서 그래. 하고 진아가 웃었다.
우리 엄마가 유명한 시의원인 건 너도 알잖아. 아빤 지금 그 잡지의 편집장이 되기 전에 신문사 기자였어. 중동에 몇 년인가 가 있었는데 나는 여섯 살이 될 때까지 엄마 아빠와 함께 있었던 기억이 없어. 우리 할머니는 좀 이상한 분이고, -그 할머니, 일부러 떨어진 옷을 입고 우리 며느리가 날 구박한다고 거짓말을 지어내던-나는 할머니랑 있는 게 싫었어. 나는 너무 사랑을 못 받았어. 받았다고 느껴 본 기억이 없어. 그런데 이제 엄마 아빠가 나온 그 우리나라 최고의 대학에, 법학과에 내가 가야 한다고 스트레스를 주는 거야. 그 사람들에게 보여 주어야 하는 거야. 나는 모르는 그 사람들. 엄마의 부하직원들이나 친구들, 후배들일 수도 있고 아빠의 출판사 동료들일 수도 있겠지. 그들에게 우리 딸도 그 대학에 갔다고 말하지 않으면 그 굴욕을 참을 수 없는가 보지. 하지만 내게는 무슨 소용이지? 안 그러니?
그러더니 그 애는 버릇처럼 아이큐가 약간 낮은 아이처럼 머리를 심하게 흔들었다. 너 뭐가 중요한지 아니? 인맥이야. 많은 사람들을 알아둬야 하는데 뭔가 지위가 있는 사람들이 아니면 안된대.

진아는 그 대학에 가지 못했다. 두 번째 대학의 정치학과에 그것도 꼴찌로 겨우 들어갔다. 무섭게 몸이 불었던 고 삼의 여름부터 그 애는 더 이상 학교 전체에서 일등을 하지 못했다. 성적은 급속히 떨어졌고 진아는 급속히 살이 쪘다. 진아는 6개월 동안을 얼음처럼 조용히 보냈다. 깊은 물속에라도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무게로 눌리어진 창백하게 질린 그런 조용함이었다.
내가 살을 다 뺏던 거 얘기했니?
미국으로 이민을 갔던 나는 그 애를 보지 못했다. 2년 후 내가 서울에 들어왔을 때 우리가 가던 프랑스 음식점에서 그 애는 내게 말했다. 손톱을 빨갛게 칠하고 똑같은 빨간 립스틱을 바르고 파마를 하고 있었다.
아이들는 내가 공주인 줄 알아.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애인 줄 알아. 내가 두배로 쪘었던 것도 모르고 내 속이 얼마나 황폐한 지도 몰라. 속으로 죽어가는 것도 몰라.
진아는 서른알의 진통제를 삼키고 거실로 걸어 나왔다고 했다. 예쁜, - 나이가 들어도 진아의 엄마는 사람들이 막내 이모냐고 물어볼 만큼 젊어 보였고 아름다웠다. –그 애의 엄마가 거실 소파에 등을 펴고 우아한 자세로 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진아는 맞은 편 소파에 걸터앉았다. 아직은 아무런 느낌이 오지 않았지만 두 손은 얼음처럼 차가와져가고 숨을 쉬기가 힘들었다. 서서히 고통이, 그건 기다란 손가락들이 오만하게 뻣어와 목을 눌러 오는 것 같은 기분 나쁘고 서서히 죄어오는 듯한 답답한 고통이었다. 그 애는 참기 시작했다고 했다. 입술을 물고 등을 기대듯이 누웠다. 그 애의 엄마가 쳐다보았다. 무슨 일이냐고 묻는 듯했다. 이제 그 애는 대답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다 기억난다고 했다. 그다지 너무 많이는 놀라지 않던 엄마, 오히려 화가 난 것처럼 굳어진 엄마와 택시를 타고 병원에 가던 길, 거기에 보이던 창백한 불빛, 그리고 위세척을 몇 번이나 되풀이하던 끔찍한 과정……

나, 그런 비슷한 경험이 있다. 모든 것을 영화를 보는 것처럼 바라보고 그 줄거리까지 알 수 있다. 그런데 고통 때문일까 아니면 굴욕감 때문일까, 나는 이미 그곳에 없다. 나는 천천히 문을 닫고 그곳에서 나간다. 내 육체가 있는 곳에, 그가 보듬는 육체 안에 이미 나는 없다.

가슴이 아파. 가슴이 너무나 아프다.
숲의 정령들이 다가와 기다란 손을 뻣었다. 아기가 방긋 웃었다.
그들이 녹색의 장원으로 아기를 데려갔다.
보드라운 그 얼굴을 한번 더 보고 싶었는데…… 아기는 웃고 있지 않았다.

진아가 모는 빨간 스포츠카를 타고 우리는 서해안을 달렸다. 나, 이년 후에 졸업을 하면 유학을 가든지 결혼을 할까 해. 머리칼을 바람에 날리며 그 애가 말했다. 노랗게 하이라이트를 먹은 머리칼들이 바람에 휘날렸다. 눈을 뜰 수가 없었는데 진아는 속도를 늦추지 않았다.
나 태희랑 헤어질까봐. 또 그 애는 바람 속에서 소리치듯이 말했다. 태희는 그 애의 남자친구였다. 비쩍 마르고 소심한 그 남자는, 국가 고시에 합격해서 외교관이 되고 싶다는 소박한 꿈을 가진 평범한 그 남자애는 가끔씩 진아를 답답하게 했다. 나는 범부의 아내로 그냥 그렇게 살아야 할까. 그러기는 싫은데.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들어갔던 미국의 대학에서 나는 한국인 친구들을 만났다. 거의 모두 조그만 사업을 하는 부모님을 도와 일을 하면서 학교에 다니던 아이들이었다. 지나치게 씩씩하고 무엇이든 깊이 생각할 시간이 없는 바쁜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조금씩 이상한 나라에 와 있는 듯한 이질감에 소름이 돋았다. 내가 가지고 있는 우수나 이유 없는 상실감 같은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현실적인 아이들이 나의 친구들이 되었다.
그런 아이들 사이에서 나는 두려움에 싸여 있었다. 알 수 없는 무언가가 그 아이들과 나 사이에 놓여있었다.
나의 겁쟁이를, 그 비겁함을 기막힌 순수함이라고 말해 주었던 친구가 있었다. 나는 가끔 소피아가 보고 싶었다. 아주 하얀 얼굴과 커다란 눈을 가진 그 애는 완벽한 현실주의자였다. 아홉 살이나 많은 부유한 사업가와 그 애가 결혼했을 때 그 애의 베스트 프렌드였던 에린은 눈물을 흘렸다. 프랑스 식당을 빌려 피로연을 하고 하얀 장갑을 낀 손으로 입술을 가리고 웃었던 소피아는 내게 들려주었다. 사라의 이야기를. 소피아의 하나뿐인 언니 사라는 정말 귀엽게 생긴 키가 큰 선배였다. 나는 한번 그녀의 결혼식에서 새하얀 드레스를 입은 공주같이 슬픈 가녀린 모습을 보았을 뿐이다. 스물두 살. 너무나 이른 나이라고 나는 생각했다. 신부는 어쩐지 가슴을 저리게 하는 슬픈 미소를 짓고 있었다. 소피아와는 조금도 닮지 않았다고 생각했었다. 동생 친구들을 보고 그녀는 똑같이 서글픈 듯한 미소를 머금었다. 귀여운 머리에는 귀여운 왕관이 반짝였다.
소피아는 말해 주었다. 숲이 많은 워싱턴 주로 시집을 갔던 언니는 아이를 갖기 위해 약을 끊었었다고. 깊은 숲, 비가 오는 날마다, 밤마다 숲의 정령들이 그녀를 불렀다. 결혼하기 전에도 햇빛이 비쳐드는 맑은 유리창 앞에 서 있거나 흐린 구름이 머리 위에 머물거나, 별빛 아래에 서 있을 때, 아니 아무 때라도 땅 속 깊이깊이 빨려드는 듯한 절망감은 언제나 비염처럼, 두통처럼 사라의 곁에 남아 있었다고 했다. 정령들은 친절하지도 않았지만 끊임없이 서걱거리며 우우 사라를 불러댔다. 비가 내리던 날, 사라는 차를 타고 숲으로 갔다.
숲의 정령들이, 나무속에 숨어 살고 있는 서글프고 교활한 영들이 그녀를 감아 안았다. 축축하고 음울한 빗소리 속에서였다. 길고 어둡고 슬픈 손을 뻣어 사라의 늘씬한 허리를 날렵하게 감싸안는 팔들… 휘감기고 늘어지는 그런 팔들……

사라를 발견한 사람은 그녀의 남편이었다. 그의 차 안에서- 밖에서는 끊임없이 비가 내렸다. 춥고 음산한 밤. 그날의 나무들은 이상한 기운에 차 있었다. 그리고 차 안에 휘감겼다 던져진 듯 기대어 있는 그녀와 피… 그가 서랍 속에 늘 호신용으로 두었던 권총. 그리고 흐느끼듯이, 히히 웃어대듯이 불길하고 불온한 나무들의 소리가 빗소리와 섞이고 있었다. 그날 세상이 조금 기울어졌다. 예쁜 사라를 가져간 그 세상과 그 후로도 오랫동안 친화할 수 없었다고 형부는 소피아에게 말했다고 했다.
후에, 형부는 평범한 다른 여자와 결혼을 하고 언니의 친구들도 소피아를 더 이상 찾지 않았을 때, 소피아는 그 공원에 갔었다고 했다. 그녀는 오랫동안 머리를 풀어헤친 나무들을 보고 있었다. 나무들은 살아 있었다. 언니가 살아있지 않은 것처럼. 그런데 말이야 혜인아. 소피아는 잠시 물기가 어린 눈으로 빈 공간을, 어떤 정적인 동물체의 다음 행위를 지키고 있는 것처럼 보고 있었다. 까만, 아주 까만 눈동자였다. 나도 그래. 혜인아. 나도. 언니에게 가고 싶다고 생각해. 1초마다 생각해. 나도 살고 싶지않아. 혜인아.

진아는 플로리다주로 유학을 가기로 결정했다. 소심하고 마음 여린 남친에게 이별을 통보한 다음이었다. 내가 그 애를 보러 갔을 때, 처음에는 그 애의 이상한 기운을 눈치채지 못했다. 뭔가 이상해 보이기는 했지만 확실한 형태로 감지되지는 않았다. 그 애는 다시 엄청 살이 쪄 있었고 아주 짧게 자른 머리에 파마를 하고 있었다. 그 애의 아파트는 유학생이 혼자 살기에는 너무 컸다. 커다란 침대와-이상하게 나태하고 저급해보이는 핑크색의 커버를 씌운, 감각 없는 신혼부부의 그것 같은 침대였다. –정말 쓸모없어 보이는 커다란 TV, 그리고 제대로 된 냉장고가 있는 방이 두개나 되는 아파트였다. 문을 열면 밖에서 벽을 큰 발로 기어다니는 모기들이 문 안으로 들어왔다. 습기 찬 오월의 구십도의 미국 동남부, 악어들이 썩어가는 듯한 검푸른 녹색 물 안에 떠도는 그곳에서 내 친구는 눅눅한 공기 중에 부유하듯이 공중에 떠 있었다. 땅은 늪이었다. 그녀의 모든 세상은 늪지대였다. 진아는 나를 데리고 그녀가 잘 간다는 아주 낡은 성당으로 갔다. 잡초들이 누운 그곳은 프랑스의 성당을 떠올리게 했다. 오래된 돌로 쌓은 조그만 탑이 있고 연못도 하나 있고 바랜 흰 건물이 서 있는, 슬픈 연인들이 함께 돌 계단에 누워 죽어갔을 것 같은 비극적인 느낌이 드는 성당이었다. 그 마당에서 진아는 잠시 서 있었다. 그리고 말해 주었다. 죄가, 그녀의 외로운 삶을 온통 찬란히 물들이고 있다고.
죄의 이야기라면 나는 싫다. 그의 눈동자가 차갑다고 생각했다. 진아를 바라보는 그의 눈동자. 입은 웃고 있는데 눈가에 주름이 잡혀 있는데, 그의 눈동자가 차갑게 빛나고 있었다. 맑은 대리석 바닥 위에서였다. 조금 살이 찐듯한 –마른 체구보다는 고급스런 느낌이 있으니까.- 잘 자란 허연 반장 같은 느낌.
진아가 웃고 있었다. 결혼 한 지 일주일 된 그 약간 통통한 남편 옆에서. 플로리다의 아파트가 그 남자의 호텔보다 나았다. 준수한 호텔을 가지고 있다던 남자. 푸른 늪지대의 악어와 같은 죄악의 모습이 차라리 그리웠을 그 애가 견딜 수 없이 불쌍했다. 그 눈동자.

그애가 관계를 했을까. 그런 것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그런데 그 커다란 침대의 느낌이라니. 그 말도 안 되는 핑크라니.

선배는 눈썹이 아주 길었어. 속눈썹 말이야. 진아의 얼굴이 조금 상기되는 것도 같았다. 그 사람이 나를 데리고 캠퍼스를 보여 주러 갔어. 차를 타고... 바닷가며 좋은 바나 음식점. 그리고 내게 말했지. 결혼하기 전에 널 만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하고. 지금의 아내와는 거의 정략결혼이었다고, 부모님이 원했기 때문에, 죽어버리고 싶을 만큼 지루한 이 삶에서 그딴 거는 아무래도 좋았으니까, 라고.
그리고 내 친구는 잠시 바닥 어딘가를 무언가를 찾아내려는 듯이 내려다보았다. 내가 그의 이상형이라고 했어. 언제나 꿈꾸었던.
진아는 내게 그 당시의 자기 사진을 보여주었다. 그 당시라고 해야 이년 전이었다.
굵은 웨이브를 넣은 긴 머리가 바람에 조금씩 날리는 아주 날씬해진 그녀는 에티켓 학교에서 배운 대로 멋진 색조화장을 하고 있었다. 슬픈 듯 촉촉해진 눈빛과 밝은 빛깔의 아이 셰도우, 촌스럽지 않은 상큼한 입술빛깔 그리고 연한 볼 터치도 그 애의 얼굴을 부드럽게 만들어 그 애는 아주 여성적이고 상냥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나는 새삼 진아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도로 살이 쪄 버린, 짧게 잘라 귀 바로 밑에서 곱슬거리는 파마머리와 동그란 얼굴. 피부도 상해 있었다. 이년 사이에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니.

옐로우 스톤을 보러 떠났던 건 언젠가 보았던 나무들과 뜨거운 유황 온천수가 흐르는 바위 위에 나와 앉아 있는 버팔로들과 사슴들이 보고 싶어서였다.
김이 피어오르는 에메랄드빛의 뜨거운 물을 내려다 보고 있으면 그 시가 생각났다. 가슴 속에 뜨거운 물을 출렁거리며서… 라고 하던 시가.
나는 함께 있는 것이 고통이 되어버린 나의 애인을 생각했다. 부글부글 끓고 있는 진흙탕을, 그 머드 풀을 한참 동안 내려다보았다. 검고 짙은 머리를 내려뜨린 아름다운 내가 보였다.
사랑한다. 라고 그가 말하는 입술이 보였다. 유난히 하얀 윗니가 보였다. 그리고 그의 마음도 보였다. 짧은 머리를 한 까무잡잡한 얼굴의 그 여자애가 그 마음의 바닷가 카페에서 걸어나갔다. 그날, 파도가 셌다. 유리창을 깨뜨릴 듯이 부딪혀 왔다. 그 여자애와 그 카페에서 유리창에 부딪히는 파도를 맞으며 그는 무슨 이야기를 했을까 하고 나는 조용히 끓고 있는 진흙을 바라보면서 생각했다.
그러자 고통이 왔다.
정오의 햇빛이 무섭게 내려와 꽂히는 오스트레일리아의 사막. 기온은 화씨 120도를 넘어섰다. 뜨겁게 이글거리는 그 땅과 더위는 신체적인 괴로움으로 그 땅의 짐승들을 집어삼켰다. 그늘도 없는 그곳에서 가까스로 찾은 조그만 나무 밑에 엎드린 캥거루-동물의 왕국에서 본 그 캥거루가 온몸을 태우는 열기 속에서 자신의 혀로 발을 닦아 침으로 서늘하게 하는 모습이, 짐승의 고통이, 그 괴로운 더위와 태양이 내 것이 되어 나를 덮쳤다.
내게로 와. 나는 고통의 일그러진 얼굴을 향해 말했다. 그러나 곧 가줘. 이제는 가줘. 나는 또 그렇게 말했다. 그가 한 말과 비슷했다.
나도 힘들어. 이제는 좀 편해지고 싶어.
나, 그 여자애를 봤어. 파도가 유리벽에 부딪는 바닷가 카페에서. 그 애를 보는 너의 얼굴을 봤어. 넌 근무중이라고 했었지. 오랜만에 만난 영은이랑 바다를 보러 갔는데 거기에 너와 그 애가 있었어.
나는 말하지 않았다.
옐로우스톤의 나무들을 바라보았다. 촘촘히 발을 붙이고 서 있는 나무들.
전나무숲 사이로 바람이 불어왔다.
일만년전의 여름이나 겨울, 빙하기의 끄트머리에서 인디언들이 바라보았을 숲, 오래된 숲 속에 서 있는 느낌은 어쩐지 슬펐다. 유한한, 거기에 짧기까지 한 인간의 삶을 보았기 때문일까. 나무들은 말없이 떨어지는 오후의 황금빛 속에 거룩한 의식의 일부분처럼 머리를 고정시키고 서 있었다.
나무들의 정령들이 조용히 멈춰있었다.

진아를 둘러쌌던 주위의 시선들은 생각보다 힘들었다고 진아는 말했다. 유학생들은 곧, 고급스럽고 여성스럽기까지 한 진아의 다듬어진 자태와 어울리지 않으려 들었다. 다정하고 세심한 그녀의 선배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진아와 이야기를 하려고 하지 않았다. 그들은 그녀를 쳐다보고 그녀의 빨간색 스포츠카를 염오하면서 수군댔다. 선배의 키 작은 아내는 임신중이었다. 거의 7개월 째였다. 그녀는 ‘진아 언니가 예뻐.’라고 말하는 딸아이를 흘겨보았고 남편에게 그렇게 말했다. 한손에 날카로운 칼을 들고 진아라는 그 애를 찔러 버리고 싶어. 죽여버리고 싶어. 라고.
더 이상 참지 못한 임산부는 진아를 불렀다.
진아의 얼굴이 분명하게 상기되었다. 엄마에게 말하겠다고 협박했어. 그래서 그 여자가 말하는 대로 오라면 오고 가라면 갈 수밖에 없었어. 절대로 엄마가 알아서는 안되었어. 진아의 얼굴이 점점 발갛게 달아올랐다. 그때의 수치가 그대로 되살아나는가 보았다. 우유부단한 남자야. 그 선배. 정말 견딜 수 없어졌지. 서울에서 그와 만나기 바로 전에 짧게 머리를 잘라버렸어.
그를 기다리면서 길에 서 있었는데-왜 길에서 만나기로 했는지는 생각이 안나.- 낙엽이 조금씩 떨어지고 해가 검은 아스팔트를 하얗게 반사하고 있었던 것 같아. 갑자기 상실감 때문에 난 그 자리에서 해체되어 버리는 것 같았어. 나는 미용실 앞에 서 있었더라. 그래서 그냥 들어가서 짧게 커트해 달라고 했어. 남자 미용사가 –좀 뚱뚱하고 낡은 청바지를 내려 입었었어.- 와서 내 머리를 자르기 시작했지. 난,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견딜 수 없이 허전했어. 너무나 슬펐어. 그 슬픔의 모습은 거의 다 기막힌 상실감으로 나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허공에서 더 이상 아무것에도 지탱할 수 없었어.
웃기지. 지금도 그 사람을 생각해. 자꾸 생각이 나.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어. 그런데 또 그래. 난, 죽어도 그 사람과 함께 남은 생을 보내고 싶지 않아. 귀여운 얼굴과 이마에 내려오는 머리칼이 너무나 사랑스럽지만, 난, 그 사람을 믿을 수가 없어. 그는 결혼했고 아이가 생겼는데도 나를 사랑한다잖아.
아내를 사랑하지 않더라도 그녀는 곧 아이를 나을 텐데.
여자는 한국으로 가 버렸어. 아이가 너무나 커 버려 수술을 했대. 선배는 다음달에 한국에 들어가 군대를 갈 거야. 그 집은 완전히…박살이 나 버렸어.
그런데 왜 진아가 더 그렇게도 처절하게 외롭고 버려진 듯이 보이는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모든 것을 다 잃어, 꿈도, 소망도 사라져 버려서 자신도 돌보지 않고 망가져 버린, 내 친구는 그런 모습이었다.

나는 또, 가이저를 보러갔다. 그랜드 가이저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이었다. 한 시간이나 기다려 마른 모랫더미 같은 땅 위에서 물이 솟아오르기 시작하고 점점 거세고 높아지면서 분수처럼- 아주 두꺼운 분수처럼 솟아오르는 걸 바라보는 게 위로가 되었다.
내 마음의 방, 문을 닫으면 나는 완벽하게 혼자가 되었다. 창 밖으로 하얀 물줄기가 하늘로 올라가는 게 보인다. 공기는 차고 내 방엔 펭귄이 왔다. 눈이 너무 많이 내려 걸을 수 없던, 눈을 뜰 수 없던 밤이었다. 캄캄한 남극의 밤이 끊임없이 계속 되었다.
수천 마리의 펭귄들은-그것들은 사이즈도 크지 않았고 모두 수컷이었다.- 추위와 대적하기위해 촘촘히 몸을 붙이고 머리를 묻었다. 배 안에 감춘 알들을 지키기 위해 그들은 신체적인 어떤 구속보다 더 고통스런 추위 속에서 그저 참았다.
바람과 칼날보다 날카로운 눈가루가 몰아쳐 왔다.
캄캄한 남극의 얼어붙은 땅에 우리의 무언가 소중한 것이 꽁꽁 언 채로 버려져 있었다.



바보. 그가 울었다. 내 생애를 통하여 넌 다시 내 이렇게 허름한 방에 들어와 주지 않겠지. 너를 잃은 세상을 생각할 수가 없다. 그러데 그는 그 바닷가에서 유리창에 부딪는 파도를 보고 있었다.
그렇다. 나는 그의 허름한 방에 두 번 다시, 들어가지 않을 것이다.

여자애의 귀여운 커트 머리가 보였었다. 날렵하게 그곳을 나가는 그녀의 발걸음은 아주 가벼웠다. 댄서의 그것처럼. 신비스럽고 고급스럽다던 나의 얼굴보다는 많이 평범했지만 그 애는 귀여운 작은 눈과 입술을 가지고 있었다. 날씬한 그 애가 자꾸만 내 곁을 스쳐 지나갔다. 나의 우주를 그렇게 가로질러 갔다.
나는 괜찮았다. 그는 이미 나의 우주도 아니었고 나는 그곳을 떠도는 행성 따위도 아니었다.

그런데도 고통이 남아 있었다. 오랫동안.
내 친구를 이상하게 만들었던 고통과 비슷한.
둔중하고 비오는 날의 나무들처럼 머리를 숙인 축축하고 음습한 그런.

진아는 결혼을 했다. 두 번째로 모든 살을 다 뺏다고, 신혼여행 온 LA에서 만난 그 애가 작은 소리로 말했다. 남편은 내가 그렇게 쪘었던 걸 몰라. 하고 속삭였다.
그 남자. 겉보기에는 평범하고 멀쩡하고 고급스럽게 살이 쪄 있기까지 했다.
나는 모르겠다. 사악한 것은 평범한 것과 구별하기 힘든 건지. 약간이라는 건 이미 무너진 거라는 것.
농담처럼 자기 자랑과 그다지 선하지 않은 인간성을 드러낼 수 있다. 약간씩 말이다. 나는 조금도, 그 약간이 치명적일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나의 아둔함은 이제 생각하면 소름이 끼친다.
나는 그 남자가 재수 없었다.
진아하고도 이제 만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 남자의 여자가 되어버렸으니까.

나를 용서해 줘. 하고 나는 꿈 속에서 말했다. 너무나 늦어버렸다. 그러니까, 이미 나는 그런 걸 요구할 수 없게 모든 것이 망가져 버렸던 거다.

고대.
그것들의 흔적을 바라본다. 인류학자들이 찾아낸 소돔과 고모라의 흔적. 사해 가까운 곳에서 고대의 유적들이, 그 도시들의 흔적들이 발견되었다. 나는 그것들을 경건한 모습으로 보고 있다. 아니 내 모습은 사실 매우 불경스러운지도 모르겠다.
그 여름, 나는 편안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잔잔하고 서늘한 즐거운 느낌이 언제나 함께 있었다. 행복하다…고 나는 생각했다. 찰리의 삶에서 충일감을 느꼈다고 생각했다. 여름. 나는 고대의 외계인들이 타고온 우주선을 그린 벽화나 우주복을 입은 그림 따위를 보고 있었다. Ancien, 이라고 해설자가 말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는 불 비가 쏟아졌다고 했다.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후에 딸들과 동침했던 롯은 돌아보지 않았지만 그의 아내는 돌아보아 소금기둥이 되었다고. 그때 전화를 받았다. 유학중이던 영은이와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그 애가 진아의 이야기를 꺼냈다.

남자가 방에 들어왔다. 진아는 그를 쳐다보지 않았다. 그가 어디에서 어느 여자와 어떤 자세를 취하고 어떤 불의의 불을 피워댔는지 관심없었다. 그러나 그가 한 행위가 왜 그녀의 죽도록 괴로운 수치가 되는지 알 수 없었다. 아주 교활하고 주도면밀한 그 남자는 뻔뻔했다. 그와 밤을 보내는 그 여자들도 같을 거라고 진아는 생각했다.
우리 이혼했으면 좋겠어. 진아는 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두 손이 차가와져 있었다.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그런 것들이 그녀는 싫었다. 대답이 없어서 그녀는 돌아보았다. 남자는 천천히 넥타이를 풀고 마치 시름에 잠긴 사람처럼 작은 장식용 테이블 앞에 있는 장식용 의자에 앉았다. Off white의 고급스런 프렌치 세트는 진아의 엄마가 사 준 것이었다. 잎사귀 모양의 역시 프렌치 스타일의 침대와 매치되는 것으로 이제 그녀는 그 모양과 색깔, 로코코까지 생각만 해도 구토가 올라왔다. 그 남자가 누워 자던 모습이 생각나서였다. 그의 눈빛이 비열하게 빛났다. 물기가 어린 듯도 했다.
그리고 한쪽 입술을 일그러뜨리듯 하면서 웃었다. 미쳤냐. 누구 좋으라구.
그리고 그녀를 바라보았다. 무언지 분별치 못할 것 때문에 그녀는 소름이 끼쳤다.
네가 더러워.
진아가 말했다.
그가 벌떡 일어나며 그의 웃옷을 바닥에 집어던졌다.
야 이 더러운 년아! 니가 더 더러워!
그가 그렇게 소리질렀다.
나는 열 일곱살때 Jesus Christ Superstar- 뮤지컬을 보았고 곧 빠져버렸다. 신을 믿지않았던 나는 그 사람, Jesus에게 빠졌다. 겟세마네 동산에서 목요일 날 밤, 고통에 가득 차서 기도하던 너무나 인간적인 그 사람이 멋있다고 생각했다. 영화를 만들었던 감독은 Ted Neeley와 그의 crew를 이스라엘로 데려가 모든 영화를 그곳에서 찍었다. 유다를 향해 모래 먼지를 일으키며 조용히 돌진하는 탱크라든지, 검은 옷을 입은 바리새인들이 나무와 철로 만든 사막 한가운데의 조형물 위에 서 있는 음산한 모습이라든지, 꿈을 꾼 빌라도라든지, 그리고 사막 한가운데의 바위산…나는 그런 것들을 바라보았다.

거기 그 나무가 있었다. 죽은 나무. 이파리도 없고 그다지 높지않고 한쪽 팔을 펴듯 구부러진 그 나무, 가롯 유다가 목을 매어 죽은 나무였다.
나는 그 나무를 생각했다. 진아의 남자가 진아가 알거나 모르는 많은 여자들과 만들어내는 더러움에 대해 생각했다.
그리고 진아의 선배가 생각났다. 우유부단하고 귀엽게 생겼다는 그 선배와 진아가 뒹굴던 진창을 생각했다. 짧은 머리의 댄서 같은 발걸음의 여자가 그 바닷가 카페에서 진창으로 걸어나가는 게 보였다.

진아의 우울증은 어떤 발병처럼 온 것은 아니었다. 어릴 적 피아노 위에 인형들을 늘어놓고 혼자만의 콘서트를 열던 세상에서 떠밀려 나온듯한 꼬마 때부터 아니면 더 전부터 어떤 기운처럼 감돌던 force였다. 수면제를 삼켰던 그날도, 긴 머리칼을 잘라 버렸던 오후, 혼자서 몇 번이고 몇 번이고 찾아갔던 그 낡은 성당의 낮은 탑이 있던 자리, 의식을 행하듯 탑 주의를 자꾸만 돌던 그런 날에 자욱하고 낮게 깔려 있던, 머리를 숙인 나무들이 촘촘히 서 있는 그곳을 메우던 안개처럼 그녀의 생에 서려 있었다.

일주일, 한달, 육개월, 일년…진아는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얕은 잠에 잠깐 빠졌다가 깨어나 정신이 맑은 계곡의 물보다도 맑았다. 절대로 절대로 잠들 수 없는 매일의 밤은 지옥처럼 끝없이 길었다. 새벽 2시부터 5시는 있는 그대로의 지옥이었다. 스스로에 대한 비난의 소리가 그 밤과 새벽 내내 이어졌다. 너의 삶은 있는 그대로의 실패가 되어버린 거야. 너는 절대로 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없을 거야. 그 더러운 남자는 지금도 더럽게 진창을 뒹굴며 여자들과 섞여 있을 거야. 아니 그 불길한 얼굴의 여자와 살을 비벼대고 있는 거야. 더러워. 너의 더럽혀진 삶도, 죽음도 모든
것도. 그 소리들에서 벗어날 수만 있다면 진아는 무엇이든지, 무슨 짓이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내 아기.
아가.
짐승. 어린 사슴이 미친 듯 도망친다. 늑대 두 마리는 전술을 쓴다. 아주 잘 계획된 전술이라고 해설자가 말한다. 일단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달려가는 미친 무리로부터 어린 사슴을 따돌린다. 이 team이 좌우에서 밀어붙이면 너무 어려서 빠르지 못한 작은 사슴은 대열에서 떨어진다. 그러면 한 늑대가 사슴을 쫓기 시작한다. 패닉 상태가 된 사슴은 미친 듯이 육지로, 산 위로 내달린다. 정신없이 쫓길 때 다른 쪽에서 달리던 다른 늑대가 갑자기 옆에서 달려든다. 사슴은 꼼짝 못하고 주저앉는다. 얌전히 앉은 어린 사슴의 목을 늑대가 물어뜯을 때, 사슴의 눈동자는 아직도 뜨거운 열기에 반짝이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 초 만에 인형의 유리알 눈처럼 생명이 떠나간 공허한 눈이 되어있다. 생명으로 꿈틀대던 적나라한 짐승성은 이제 고요한¸ 살아 있으나 오래도록 조용했던 나무들보다 더 한없이 먹먹한 비생명이 되어있다.
이것이 존재일까 비존재일까

짐승의 몸뚱이의 존재 안에 생명이 부재하는 것 나무들이 보고 싶다 온 세계를 덮은 멋진 침엽수림이 보고 싶다.

엘로스톤에는 돌이 되어버린 나무가 있다. 나중에 보니 돌이 되어버린 짐승들도 있었다. 용암이 흘러와 나무와 짐승들을 덮었을 때 본질은 변화되었다.
성질이 변화된 것이 아니라 본질이. 마치 빛이 어둠으로 변질되고 사악한 그 사내가 진실해지듯이…?
아니 그럴 리가 없다.
그래서였을까.
진아의 절망이 전해져 왔다.

너무나 너무나 기분이 안 좋아서, 땅 밑으로 깊고 깊은 속으로 꺼지는 것 같아서, 그런 너무 안 좋은 기분이 새벽에도 아침에도 오후와 깊은 밤에도 끊임없이 영혼의 말랑말랑한 그곳을 먹어가는, 더 이상은 그것도 아무 상관도 없는 그런 공허의 상태로 끌고 가는 – 너는 그런 것을 알 수 있니?

나는 말이지. 혼자서 사막을 횡단했다. 빛이 모래를 먼지처럼 날리는 사하라의 살인적인 뙤약볕, 터어반을 두른 낙타 위의 사람들, 모래바람. 길고 으슬한 낙타의 늘어진 목. 그 그림자. 그 밑으로 천천히 고개를 드는 검은 귀신의 뒷모습 같은 것. 과거가 탱탱한 바로 지금, 그 현재와 섞이고 나의 현실이 몽롱하고 나른한 비현실과 섞이고 너와 내가 같은 넓은 그릇 안에서 말려지는 그런 사막에서 나는 현재의 꿈을 꾸었다. 귀신들이 나무의 정령들을 오염시켰다. 나는 이제 산에 사는 짐승들과 작별하였다. 사막은 산과 바다와 푸른 들을 덮었다.

진아는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랬을 리가 없다. 밤, 그 애는 캄캄한 절벽 위에 단 혼자 남겨져 있는 듯한 외로움 속에 갇혀 있었을까. 더럽혀진 그 무엇, 그것이 어떤 것인지도 알 수 없지만 소중한 그 무엇을 그 애는 혼자서 지킬 수 없었다.

엘로스톤으로 오는 길에 나는 사막을 횡단했다. 낮은 풀들이 있고 바위가 있고 도마뱀과 벌레들이 있는, 또 선인장들이 있는 생명이 있는 사막이다.
데스밸리를 지나 라스베이거스를 향한다. 여름, 데스밸리는 119도를 넘어선다. 이글거리는 땅. 이글거리는 바위와 모래. 뜨거운 물. 차에서 내려서면 모래 바람이 조금씩 불어온다. 어떤 고행이 주는 즐거움 안에 있는 것처럼 나는 잠시 서 있다. 열기와 따가움과 햇빛을 나는 견딘다.
바람이 불어온다. 내가 그렇게도 그려내고 싶었던 건 어떤 무모한 그림이었던 건가보다. 아무도 모르게 그 세상과 노을과 뛰는 황소 같은 거라도 그려내고 있었던 내 글들이 처음으로 그 사막의 한가운데서 폭염처럼 내게로 쏟아졌다. 아무도 모르게 써왔던 건 부끄러워서였는데, 그에게도 이런 가벼운 세상에서 너무 많은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는 게 부끄러웠던 거였는데 왜 꼭꼭 감추어 두었던 적의를 품은 전갈 같은 글자들이 내 가식의 피부를 뚫고 들어오는 걸까. 메뚜기 떼처럼 그 까맣고 징그럽고 버글거리는 것들이 나를 뒤덮었다. 햇빛과 벌레들과 소리와 sorrow……대학을 졸업하고 몇 년을 나는 블라인드를 내린 흰 꽃들이 핀 화분이 놓인 내 스튜디오 안 앤티크 책상 앞에 앉아있었다. 아무것도 쓸 수가 없었다. 친구들 모두 무언가
생산적인 일을 시작한 후에도 한참을 나는 무언가 쓰려고 했다. 바닷가, 떠밀려 온 어떤 몸체에 대해서. 달빛의 잔인한 각도에 대해서.
나는 쓸 수 없었다.
그때 그 여자가 내 빈곤한 바닷가를 발레리나처럼 가볍게 걸어갔다.

진아는 그 방에, 혼자 있었다. 바람이 조금은 불었던가, 생각이 나지 않았다. 흰 벽지를 바른 방, 조그만 꽃무늬가 우아하게 새겨져 있는 오프 화이트의 벽지와 천장, 고급스런 가구들과 흰 새틴의 살짝 흔들리는 것 같은 커튼을 바라보았다. 아무런 느낌이 없었다. 그녀는 슬프지도 괴롭지도 억울하거나 분노에 가득 차지도 않았다. 아무 느낌이 없는 텅 빈 그 어떤 힘 안에 무방비였다.
그녀는 이제 낯설은, 어떤 냉기로 가득할 뿐인 세상을 일별했다. 그리고 손 안에 쥐고 있었던 하얀 알갱이들을 입 안에 넣었다. 그리고 물을 마셨다. 식도를 타고 분해되어가면서 알갱이들이 넘어가는 것이 분명하게 느껴졌다. 어떤 기억이 되살아 오는 것 같았다. 스무 살 때, 약을 먹고 거실로 걸어나오던 희뿌연 한 전등불빛 같기도 하고 바람이 불던 길거리에서 떨어져 내리는 낙엽들을 보면서 느꼈던 온몸이 허물어지는 것 같은 상실감 같기도 했다.
아니면 조금 더 옛날, 아주 어렸던 날 인지되기 전의 불빛들 같기도 했다. 영원한 세상이 있다면 그 세상의 슬픈 투영 같기도 했다. 어느 것이던 상관없었다.
아무것도 아무것과도 어떤 관계와도 상관없는, 그런 무감각일 뿐이었다.
그녀는 기다렸다. 고통이든, 숨막힘이든, 미칠듯한 그리움이든- 초조하거나 기대 따위는 없었다. 이제 세상이 끝나고 그녀도 끝나는 것, 그것을 기다렸다…
나무들이 발을 내리고 서 있다. 펼쳐진 침엽수림은 끝없이 뻣어 있어 지구를 덮고 있다. 그건 우주로 나아가 금성에까지 닿아 있다.
아니 은하수를 지나 다른 유니벌스까지, 무한에까지, 그래서 그건 존재하거나 하지 않는 것과 상관이 없는 곳에까지 가 있다. 이제 진아가 그 우주로 스며드는 것을 그 애는 기다리고 있다. 우주에는 나무들이 서 있다. 진아의 짐승이 우주의 나무와 섞인다.

여름날, 햇빛이 내려오는 운동장은 비현실적인 무엇으로 가득했다. 천명이 넘는 아이들이 가득 서 있는 어린 정기 같은 것으로. 나도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햇빛은 내장으로 간으로 가슴으로 심장으로 들어왔다.
진아가 내 앞에 서 있었다. 조용히 그 애의 곱슬머리가 햇빛 아래에서바람 속에서처럼 흔들거렸다. 그리고 더 조용하게 그 애의 몸이 운동장의 고운 흙 위로 쓰러져 내렸다.

그는 아기에 대해서 알지 못했다. 캄캄한 숲으로 길게 팔을 뻣어 아기를 데려갈 때에도 그는 발레리나와 같이 가벼운 걸음걸이의 여자애와 함께 있었다. 나는 알 수
있었다. 느낄 수 있었다. 불쾌감은 나의 깊은 물속으로 가라앉는 몸을 더욱더 심연으로 끌고 들어갔다. 차가운 수술대 의자에 누워 눈을 멀어 버리게 하는 강렬한 빛 아래에서 눈을 감았을 때 나는 알았다. 벗어날 수 없는 것이었다.

데스밸리를 지나 라스베이거스의 벨라지오 호텔에서 일박한다. 나는 가볍고 흥분된 마치 자잘한 매일의 축제와 같은 죄의 도시가 좋았다. 최신 유행의, 그것을 입으면 발걸음과 자태까지 경쾌해지는 옷을 입고 샌들을 신고 반짝거리는 고급 백화점의 대리석 위를 걸어가는 것이 좋았다. 입 안에 감기는 달콤한 칵테일의 그 맛이 좋았다. 그리고 그 여자들. 새벽이나 이른 아침, 허벅지를 다 드러낸 짧은 치마를 입고 입술을 빨갛게 칠한 그 여자들을 쳐다본다. 스물 두세살의 젊은 처녀들과 서른이 훨씬넘은 여자들. 그 밤을 구역질나는, 머리가 허연 남자들과 보낸 그 여자들. 돈을 번 여자들. 그래도 그들의 진창은 진아 남편이나 그 애 자신의 것과는 다른 걸까.
그렇다면 나는. 아기에 대해, 숲의 서걱거리는 납치사건에 대해 모르는 그의 진창은.
그래도 진아가 깊숙히 빨려드는 그 수렁에서 몸을 일으켰더라면 좋았을 거라고 나는 핑크와 연보라와 형광의 불빛들 속에서 생각했다. 생각하는 것에 진절머리가 난다고.

꿈. 진아와 나는 맑은 물이 가득 차 출렁거리는 풀 가장자리를 함께 걸었다. 우리가 나눈 얘기는 어린 시절과 젊은 날들에 관한 것이었다. 그래서 축축하고 반짝거리고 정교하게 아름다운 슬픈 물결같이 아련한 느낌이었다. 가벼운 하늘색 풀과 그 물과 어떤 그립고 슬픈 느낌 안에서 진아가 깨어져 내렸다. 무너지는 그 애를 나는 꽉 껴안았다. 살과 살이 맞닿는 가슴 아픈 공감과 설명하기 힘든 애정 안에서 나는 울고 싶었다. 진아도 울고 싶다는 걸 너무나 확실하게 느꼈다. 그 깊은 껴안음 안에서 나는깨어났다.

호텔 밖은 잔디가 깔려 있는 능선이다. 가끔 밤을 거니는 사람들이 있지만 깊은 밤엔 조용한 바람뿐이다.
진아가 누워있을 것만 같은 그 옆, 조그만 동산 같기도 하고 우윳빛 달빛 같기도 한 비탈 끝자락에 누워본다.
살아있는 것이 죽어있음과 조금도 차별되지 않는 이런 느낌을 그는 알까. 진아는, 진아는 그걸 느꼈을까. 점점 숨을 쉬기가 힘들어지고 눈이 보이지 않아지고 귀가 들리지 않기 시작하면서 뱃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고통스런 구토가 올라올 때 그 애는 아마도 알았던 것 같다. 이제 내가 그걸 느낄 차례다.
어둠이 밀려와 있었다. 테두리처럼 나와 잔디밭을 둘러싼 어둠은 너무 두꺼워서 검은 덩어리를 향해 숨을 내쉬어도 자꾸만 가슴을 덮쳐왔다.
-남 아메리카의 재규어, 플로리다의 검은 표범, 깊은 숲 속 그늘에 짐승들은 몸을 묻히고 이쪽을 내다본다.
토실한 밤색 털을 뚫고 귀여운 아기사슴의 목덜미에 날카로운 이빨을 박고 싶은 처절하고 정직한 본성의 충동으로, 튀어오르고 흘러내리는 새빨간 피를 핥고 싶은 목마름으로 눈을 반짝이면서, 생의 늘어진 지루한 목덜미를 한순간에 물어뜯기 위해 나무숲 깊숙이 몸을 숨기고.
나무들이 또 머리를 내려뜨리고 있다. 그들이 행하는 의식을 나는 경건한 신도처럼 바라본다. 거대한 나무들의 그늘이 가만히 내려와 은은하게 나를 감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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