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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토리 IN] 소주처럼 쓴 소송

소주는 쓰다.

생산지가 여러 곳이라서, 유효기간이 얼마나 남았느냐 등등에 따라 소주의 맛이 쓰다고들 한다.

합리적인 설명보다는 이십 수년 전 학교 선배가 한 그럴 듯한 말을 더 믿는다. 처음 소주를 마셨던 날이었다. "진짜 써요 형"이라고 했더니 그 선배는 1초의 망설임도 없이 답했다. "인생을 닮아서 그래."

멋있는 술이라는 생각이 자리 잡은 건 그때였을 거다. 그 후부터는 포장 마차를 찾을 때마다 "이모 두꺼비 한 병요"라고 줄기차게 외쳤다.



두꺼비는 진로 소주다. 20여 년 전만 해도 두꺼비가 그려진 술잔에 두꺼비 소주를 마셨다. 병은 지금의 녹색이 아니라 투명했고, 뚜껑도 트위스트가 아닌 맥주 뚜껑처럼 병따개로 따야 했다. 그리고 두꺼비가 그려진 전용 잔에 마셨다. 소주를 따를 때 가득 따르지 말고, 두꺼비가 숨을 쉴 수 있도록 두꺼비 코만큼은 남겨놓는다는 '주도'도 기억난다. 40대 이상 한국 남성이라면 대부분 '맞아 그랬지'라고 할 만한 추억들이다.

그 추억들을 인생의 쓴맛에 녹여 '두꺼비=소주'라는 공식 아래 마셨다. 미국에 이민와서도 두꺼비 소주의 선택은 조건반사와도 같았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그 선택은 항상 동일했다.

그러다 지난달 30일 하이트USA 이덕 대표를 만나면서 두꺼비의 추억과 이별해야 할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이날 그는 창고에 1년간 보관해온 진로 소주와 하이트 맥주 60만 병을 창고 밖에 내놓으면서 사실상 폐기했다. 컨테이너 분량으로는 30대, 소매가로는 90만 달러에 달하는 엄청난 양이다. 비록 1년 가까이 된 묵은 재고지만 그 많은 술을 버릴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현재 진행중인 소송 때문이다.

이덕 대표의 하이트USA는 2003년부터 지난해까지 12년간 하이트진로의 주류를 미주 지역에 유통했던 한인 업체다. 오랜 사업 파트너 관계는 2014년 하이트진로측이 하이트USA를 상대로 계약 해지 소송을 제기하면서 깨졌다. 계약 조항 중 '계약 기간은 4년으로 하되 특별한 문제가 없으면 자동으로 갱신한다. 어느 쪽도 일방적으로 계약을 해지할 수 없다'는 내용이 문제가 됐다. 하이트진로측은 "이 계약 조항은 이덕 대표가 하이트진로의 민병규 전 법인장과 꾸민 사기(scheme)"라고 주장하고 있다. 하이트USA에 유리한 계약을 만들기 위해 이 대표가 민 전 법인장에게 뇌물을 줬다는 주장도 소송에 덧붙였다.

그러나 이 대표는 "내게서 유통권을 빼앗기 위한 대기업의 '탐욕(greed)'"이라고 주장했다. "제조업체 '갑'이 유통업자 '을'을 상대로 거짓 주장을 펼치고 있다"는 이야기다.

소송 자체는 양쪽 이야기가 맞서고 있어 어느 쪽의 손을 들어줄 수 없다. 결국 판단은 온전히 법원의 몫이다.

취재 과정에서 확인된 팩트만 지적하자면, 결국 양측의 소송 과정에서 대한민국의 대표 술이 미국 땅에서 버려졌다. 만약 주류 언론이 그 사실을 알았다면, 어느 쪽의 잘잘못을 떠나 그 자체가 망신이다.

또 다른 '사실'은 기사 보도 후 하이트진로 측의 대응이다. 하이트진로 담당자는 "변호사에게 상의하라"고 했고, 어렵게 통화한 변호사들은 첫 보도 후 사흘이 지나서야 답변에 응했다. 물론, 대기업답게 신중한 답변을 고민했을 터다. 하지만 만약 한국에서 비슷한 상황이 생겨 보도가 됐다면 한국 본사가 이렇게까지 늦게 대처했을까 싶다.

이번 소송과 관련해 가장 객관적인 의견을 LA한인타운 마켓 매니저에게서 들을 수 있었다. "상처뿐인 영광이 뻔한데 안타깝죠. 소비자들은 소송 결과를 떠나 어느 쪽도 아름답게 보진 않을 것 같네요."

이미 유통권을 상실한 이덕 대표 입장에서는 더 이상 잃을 게 없다. 반면, 하이트진로는 타격을 입을 수 있다. 3회 연속 기사로 '잠정 마무리'하기로 한 뒤 술자리를 했다. 조건반사처럼 두꺼비를 시켰다가 잠깐 망설였다.

소주가 썼다.


정구현/사회부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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