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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향계] 애완견 안락사 시킨 여인

[LA중앙일보] 발행 2007/03/21 미주판 10면 기사입력 2007/03/20 18:21

장칠봉 수의사

그녀는 한때 떠돌이 집시생활을 한 항가리 출신이었다. 그녀의 집은 호수가 내려다 보이는 한적한 산 중턱에 있었다. 주위엔 참나무가 둘려져 있고 북가주의 추운 겨울철이면 참나무에 기생하는 회색 곰팡이는 끈처럼 길게 자라 흔들흔들 늘어진다.

그녀의 남편이 벌겋게 상기된 표정으로 나의 병원에 들어서면서 빗자루를 찿았다. 들고 온 포도주병이 병원문을 열다 바닥에 떨어져 깨진 유리조각을 치워야 겠다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마치 점괘보는 집시처럼 병이 깨진 사소한 사건을 두고 오래오래 상념에 잠겼다. 그런 그가 세상을 떠난 것이 포도주병이 깨진 후 며칠 안되어서였다. 남편이 세상을 떠난 후 나는 일년에 한두차례 치료차 그녀를 방문하게 됐다. 그녀 집에 갈 무렵은 포도주 발효가 적당히 끝나 감칠 맛을 낼 때였다. 그녀는 여러 종류의 포도주를 담아 두었다가 나의 차에 실어 주곤 했다.

대부분 집시가 그러하듯 그녀는 활달하고 큰소리로 잘 웃었다. 거실에는 손수 만든 인형들이 마치 중국의 천마총처럼 가지런히 서있었다. 한 인형을 집어 들고선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군 침공 때 죽은 이웃 친구 어린이를 생각하면서 만든 인형이라고 사연을 말해줬다. 인형 대부분이 이처럼 사연을 갖고 있는 것 같았다.

퇴근하는 길에 동물들에게 예방접종을 해주기 위해서그 녀 집에 들렸다. 외롭게 있을 그녀를 모른채 그냥 나올 수가 없어 차한잔을 하면서 그녀의 집시생활을 또 들어 주었다.

밖에 나오니 찬바람이 몹시 불었다. 아까 올 때 요란스럽게 짖어대던 개들도 현관 앞에서 자던 고양이들도 보이지 않고 바람소리만 사납게 들릴 뿐 사방이 캄캄했다.

차에 올라 혼자가 되니 그녀의 지난 세월 이야기 때문인지 날씨 때문인지 타향생활의 무서움과 외로움이 확 밀려오면서 웬지 모를 서글픔까지 느껴졌다. 을씨년스런 기분을 지워보자고 라디오를 크게 틀었다. 그리고 천천히 후진을 했는데 바퀴가 장애물에 끼었는지 움직이지 않았다. 앞으로 조금 전진해서 가속으로 후진했다. 쿵 장애물을 넘었다. 방향을 틀어 음악소리에 콧노래 맞춰 나의 집으로 향했다.

얼마쯤 가다 뭔가 스쳐 지나치는 느낌이 있어 차를 돌려 그녀의 집으로 질주했다. 아 그랬구나 그 장애물이 동물이었구나. 내가 나의 차로 내가 조금전 예방접종한 검은 개를 쳤다. 바람을 피해 따뜻한 엔진 밑에 움츠려 있다 변을 당한 것이었다.

집안에 있던 그녀가 상황을 보고 밖으로 나왔다. 그제서야 정신차리고 병원에 데리고 가서 응급처치 하려던 내게 "치료하지 말고 안락사를 해달라"고 했다. 응급조치를 취하겠다는 나의 제안에 "고통없이 죽는 것이 생명을 조금 연장하는 것 보다 낫다"며 안락사를 요구했다.

일년이 지난 후 나는 그녀를 다시 방문하게 됐다.그녀의 생활은 여전했지만 그녀는 대수롭지 않게 "지금 내 몸 속에 필요없는 것이 자라고 있다"고 했다. 의사들은 수술과 항암치료를 권장하지만 진통제만 복용하고 있다고 했다. 나역시 치료받아야 한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웬지 입속에서만 맴돌뿐이었다. 그녀는 나에게 포도주를 안겨주며 "또 보자"고 했지만 그것이 마지막 만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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