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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민군 포로에서 기업체 회장 선교사업까지

"어머니의 기도 50년 동안 꾸준히 해온 새벽기도의 힘"

북한군 인민군 포로 막노동꾼 하수구 청소부 간장 배달부 나일론섬유 세일즈맨 동방산업 회장 이스트가스펠미션 대표…. 이병익 장로의 이력서이다.

"너는 위대한 사람이 될 거야." 이 장로의 어머니는 아들에게 자주 이렇게 말씀하시곤 했다. 북한의 작은 섬 신미도에서 태어나 가난해 중학교도 못가는 처지였던 이 장로에게 '위대한 사람'은 꿈을 키우는 원동력이었다.

그 꿈은 '여학교 설립'에서부터 시작됐다. 그의 어머니는 성경을 읽고 싶다는 염원 하나로 독학으로 한글을 깨우쳐 물레를 돌리면서 성경을 읽곤 하셨다. 꼬마 이 장로는 이런 어머니를 보면서 '여학교를 세워야 겠다' 꿈꿨다.

"어머니는 외울 수 있는 성경구절도 많았어요. 찬송가도 200~300곡 외우셨었죠." 1945년 광복 후 그는 꿈에 그리던 신성중학교에 입학하게 되었고 동시에 공산화 되어가는 북한에서 그리스도인으로 핍박받기 시작했다. 그러다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이 발발했다.



◇전쟁포로에서 사업가로=이 장로는 북한군으로 전쟁에 징집돼 전쟁터에서 연합군에 잡혀 인민군 포로수용소로 넘겨졌다. 포로수용소 생활은 하루 하루 생과 사를 넘나드는 고비의 연속이었다.

1953년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의 특단으로 자유의 몸이 된 그는 가족을 찾아 목포로 떠났고 기적같이 남으로 피난온 어머니를 만나기에 이른다. 하지만 1달만에 어머니는 사망했다.

사촌과 어린 동생의 생계를 책임져야 하는 가장이 된 그는 하수구 청소부를 거쳐 목포에서 자전거에 간장을 실고 다니는 세일즈맨이 되었다. 새벽 4시에 기상해 자정에야 잠이 드는 20시간 풀타임 스케줄은 그 후로도 50여년간 지속되었다.

그 와중에도 그는 새벽기도를 빠지지 않았다. "세상을 접하기 전 하나님과 더불어 한 날의 생활계획을 세웠습니다. 하루를 새벽기도로 시작하면 하루가 아름답습니다."

욕지기가 나오는 하수구를 청소하면서도 간장을 배달하면서도 그는 꿈을 잃지 않았다. "나는 지금 비록 못살지만 꿈이 있어야 된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첫째는 신용있는 사람이 되자고 결심했습니다." 실제로 그는 사업을 하면서 대금은 빚을 내서라도 꼭 갚았다.

노력하는 삶도 그의 신조였다. "노력은 무섭습니다. 천재도 결국 99%의 노력으로 이뤄지는 것 아닙니까."

이 장로는 그 후 나일론 섬유 사업에 발을 들여 승승장구 하다 마침내 1969년 동방산업을 세우기에 이른다. 40대의 젊은 나이에 한 회사를 맡기 시작한 것이다.

◇교육에 대한 열정=여학교 설립에 대한 꿈은 여전히 남아있었다. 그는 우선 공장 여직공을 위한 야간학교를 설립했다.

"어린 여자아이들이 학교도 못 다니고 일만 하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처음에는 공식인가를 못 받았지만 새마을 우수업체로 선정된 동방산업을 시찰 나온 박정희 전 대통령이 여공들을 위한 학교를 보고 "재벌기업도 하기 어려운 일을 중소기업이 하다니 훌륭하다"며 즉각 정식학교법인을 내주기로 약속했다. 산업체 부설학교 혜천여중고가 1970년대에 설립되었고 이어 정규학교인 동방여중고가 잇따라 일어섰다.

학교가 늘어나는 만큼 사업도 나날이 발전해 개발사업 신용금고 엔지니어링 식품에 이르기까지 10여개 분야로 커져 나갔다. 박정희 등 역대 대통령으로부터 받은 수출증대 산업표창(1976) 수출산업발전 유공표장(1978) 수출신장 유공석탑산업훈장(1979) 국민훈장석류장(1987) 등 상도 쌓여갔다.

동시에 그는 장로 사역도 감당했다. 1979년 대한예수교장로회 전국장로회 회장을 맡고 한국기독실업인회 부회장까지 이르는 등 그는 크리스천 비즈니스맨으로서의 모델을 구축해 나갔다.

성공대로를 달리는 사업 여학교 설립 꿈의 실현. 하지만 이 장로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이 장로는 1987년 대전간호대학을 인수 현재 28개학과의 혜천대학으로 키워놓았다. 독학으로 한글을 깨친 어머니로 시작된 작은 꿈 씨앗이 이 같은 열매를 맺어 놓았다.

◇미국에서 시작된 선교사업=이 장로의 사업은 한국에만 국한되지 않았다. 1993년 도미한 이 장로는 과테말라와 온두라스에 의류공장을 세우고 직접 운영해오다 지난해 모든 사업에서 손을 뗐다.

"2006년 모든 세상의 사업에서는 은퇴했고 이제 선교사업에만 힘쓰고 있습니다." 이 장로가 요즘 하는 일은 1998년에 세운 비영리 선교법인 '이스트가스펠미션'이다.

온두라스 우크라이나 인도 등 세계 각지에 나가있는 선교사들에게 선교비를 후원하고 미국내 다양한 선교기관에 문서.방송 선교비를 지원하는 일이다. 또한 선교에 비전이 있는 불우한 학생과 신학생들에게 장학금을 지원하고 장애인 단체와 병원도 돕고 있다.

2003년에는 버지니아주에 '에스라 선교재단'을 세울 부지를 구입했다. 참된 제자훈련원을 목표로 한 이 곳은 지난 2월 극적으로 조닝변경 허가를 받고 2009년 문을 열 계획이다. 소수 40~50명씩 모집해 제자 훈련을 시킬 예정이다.

이런 이 장로의 비전과 사역으로 그는 지난달 뉴욕신학대학(NYTS)이 수여한 '도시 천사상'을 받았다. 특히 아내인 이홍은 권사와 같이 받아 더 뜻깊었다. 그는 "미국 생활 10여년 만에 벌써 큰 상을 받았다"며 "하나님에게 감사할 따름"이라고 겸손해 했다.

포로수용소에서나 한국 그리고 미국에서도 항상 이 장로의 마음 속에 새겨져 있는 성경 구절은 '네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그 나중은 창대하리라'. 선교사업으로 꽃 핀 그 '창대한 나중'으로 인해 팔순인 이 장로는 오늘도 바쁘다.

조진화 기자

jinhwa@koreadaily.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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