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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향계] 미국 사는 또 하나의 즐거움

[LA중앙일보] 발행 2016/10/17 미주판 8면 기사입력 2016/10/16 17:44

이 종 호 / OC본부장

주말 1박2일 비숍을 다녀왔다. LA서 약 300마일, 14번 395번 길을 따라 쉬엄쉬엄 가면 5시간, 부지런히 달려도 4시간은 가야 한다.

이미 여러 번 가 본 길이지만 나는 여전히 이 길이 좋다. 드넓은 광야 위로 끝 간 데 없이 뻗어 있는 곧은 길이 좋고, 적막한 행성을 홀로 헤매는 우주인 같은 느낌이 좋다. 장엄한 험산 준봉들이 좋고, 한없이 삭막하되 왠지 엄숙해지는 모하비 사막의 광활함도 좋다.

이스턴시에라 여행의 전진기지 비숍. 절정의 단풍을 놓칠까봐 여장도 풀지 않고 산기슭으로 달려갔다. 168번 산길, 노스레이크 초입이다. 아, 저 단풍. 자그마한 마을을 뒤덮은 눈부신 물결. 샛노랗게 변한 아스펜(백양목) 나뭇잎들이 농익어 가는 오렌지 빛깔만큼이나 짙고 곱다. 그래, 이 맛에 여길 오나 보다. 천리를 달려온 노고가 단숨에 씻기는 것 같다.

몇 장 사진을 찍고 부지런히 오후 산행에 나섰다. 조붓했던 오솔길은 점점 가팔라지고 숨은 턱까지 차오른다. 그러기를 두어 시간,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훔치며 살피니 주변은 벌써 늦가을 정취다. 불과 며칠 전 온 산을 노랑으로 물들였을 아스펜 나무들은 어느새 앙상한 가지로만 남았다. 화려한 날은 이렇게 짧은 것이구나. 우리네 인생도 그렇겠지. 가을 산은 사람을 이렇게 한순간 철학자로 만든다.

이튿날은 아침부터 서둘러 사우스레이크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단풍은 외려 여기가 더 장관이다. 아침 햇살을 받아 더욱 눈부신 아스펜 숲. 아쉬움을 뒤로 하고 서너 시간을 내쳐 걸었다.

뾰족뾰족 솟은 회색 봉우리 사이 사이로 이어진 비숍 패스 등산로. 길은 팍팍하고 메말랐다. 신발도, 바지도 온통 희뿌연 흙먼지다. 그 와중에도 누군가의 땀과 수고가 밴 흔적들을 만나니 반갑고 고맙다. 디딤돌도 괴어 두고 길 안내 표지판도 세워둔 산길, 이런 심산유곡에서도 얼굴 한 번 본 적 없는누군가의 신세를 지는구나 생각하니 감사의 마음이 저절로 일어난다.

이제 해발고도는 1만 피트 이상. 고산증 탓인지 속이 조금씩 울렁거리고 머리는 하얗게 비어 간다. 그때 홀연히 마주친 호수 하나. 길게 뻗어 있다 해서 롱레이크다. 주변 봉우리 응달엔 녹지 않은 잔설이 아직도 남아있다. 숨이 멎을 듯한 풍광에 물빛은 왜 또 그리 눈부신지. 호수 주변엔 맑은 물까지 졸졸 흐른다. 마침 그 물길 위로 떠가는 나뭇잎 하나. 옛 시인이 읊었던 선경(仙境) 그대로다.

'問余何事栖碧山(문여하사서벽산) 笑而不答心自閒(소이부답심자한) 桃花流水杳然去(도화유수묘연거) 別有天地非人間(별유천지비인간).' -이백 '산중문답'(그대 왜 이 깊은 산 중에 사느냐는 물음에/ 그저 웃을 뿐 답하지 않으니 마음 더욱 한가롭구나/ 흐르는 물 따라 복사꽃 아득히 흘러가는 이곳/ 전혀 딴 세상, 인간 세상이 아니로세)

산은 늘 우리에게 무위자연(無爲自然)을 일깨우는구나. 인위적인 것에 얽매이지 말고 본성 그대로 자연스럽게 살라고. 그것이 진정한 행복의 비결이라고. 절경에 취해 이런저런 생각에 젖어 있노라니 지난해 고국 방문길에 찾았던 제주도 한라산이 떠오른다.

거의 흙 한 번 밟지 않고도 정상까지 오를 수 있도록 단장해 놓은 등산로, 히말라야도 너끈히 오를 듯한 태세의 전문 장비로 무장한 등산객들, 차려 입은 옷은 왜 또 그렇게들 알록달록 화사한지. 요란한 인공(人工)에 점령당한 그곳은 이미 자연이 아니었다. 그에 비하면 미국 산들은 얼마나 기특하고 갸륵한지. 띄엄띄엄 만나는 이곳 등산객들은 또 얼마나 소박한지.

그러고 보면 있는 그대로의 자연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찾아가 안길 수 있다는 것, 이런 게 또 하나의 미국 사는 즐거움이 아닌가 싶다. 생큐, 비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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