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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 오디세이] 심포니 덴탈 윤종순 원장…첼리스트에서 치과의사로…거침없는 그의 손

고2때 음대 진학 결심
경희대서 첼로 전공해
맨해튼 음대서 석사학위
카네기홀 데뷔무대 가져

결혼 후 치대 진학 도전
준비 1년 만에 유펜 합격
"한인 환자들과 정 나누며
치과의사 된 것 보람느껴"


참 부러운 인생이다.

그가 들으면 분명 손사래부터 치겠지만 주변에서 뜯어 말려도 가보고 싶은 길은 기어코 걸어가 오늘에 이른 이 남자, '심포니 덴탈' 윤종순(47)원장이다. 전도유망한 첼리스트의 길을 접고 서른 다 돼 미국 치대에 가겠다고 선언했을 때 주변에선 우려의 시선을 보냈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에서 음대를 졸업하고 군복무까지 마친 토종 1세가 2세들도 힘들다는 미국 치대에 가겠다고 했으니 그 우려가 백번 이해가 가고도 남는다.

이뿐만 아니다. 첼리스트가 되겠다며 음대 진학을 결심한 것도 고2때라 하니 한국 입시현실을 고려하면 이 역시도 무모한 도전처럼 보인다. 정답이 없는 게 인생이라고는 하나 얼마나 배짱 두둑하고 자신감 넘치길래 아니면 무슨 사연 있어 그 또래 한국 남자들은 잘 '저지르기'않는 길만을 골라 걸어왔나 궁금해졌다. 문제적 남자, 윤 원장을 클래식 선율로 가득 찬 그의 진료실에서 만나봤다. 첼리스트만의 섬세한 감수성과 개구쟁이 소년의 천진난만을 교묘하게(?) 오가는 그와의 대화는 꽤나 유쾌하고 흥미로웠다.



#소년, 클래식에 빠지다

춘천에서 나고 자란 그는 지역일대에서 유명한 내과 의사였던 부친 덕분에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냈다. 부친이 쉰 넘어 낳은 늦둥이였던 그는 아홉 살 때 같은 동네에 살던 조카들이 악기를 배우는 걸 보고 취미삼아 첼로를 시작한 것이 첼리스트가 된 계기가 됐다. 이처럼 얼떨결에 시작은 했지만 학창시절 내내 춘천 일대의 크고 작은 콩쿠르를 싹쓸이 할 만큼 그의 음악적 재능은 일찌감치 빛을 발했다.

"그렇다고 그때부터 첼리스트가 되고 싶었던 건 아니었어요. 중고교 시절 좀 심하게 사춘기를 겪다 클래식 음악에 빠져 첼로를 전공하기로 마음먹었죠. 그게 고2때였으니까 늦어도 너무 늦은 결정이었죠. 제가 그래요. 뭐든 좀 느려요.(웃음)"

그렇게 1년을 준비해 1987년 경희대 음대에 입학했고 대학 졸업 후엔 미국 유학길에 올랐다. 1995년 맨해튼 음대 대학원에 진학해 교내 오케스트라 수석 연주자로 활동하며 1997년 석사학위를 받았다. 대학원 졸업 후 그의 인생엔 많은 변화들이 생겼다. 가장 큰 변화는 같은 대학원에 재학 중이던 아내 줄리 윤(44)씨와 3년 열애 끝 결혼에 이른 것. 그리고 연주자로서 커리어도 승승장구해 2000년엔 '뉴욕 국제 영아티스트 콩쿠르' 첼로부문에서 입상을 하며 특전으로 주어지는 뉴욕 카네기홀에서 데뷔 무대를 가졌다. 이렇게 전문 연주자로서 엘리트 코스를 착착 밟아가고 있던 그 무렵 어찌된 영문인지 그는 치대 진학을 결심한다.

"결혼하고 나니 가족 부양에 대한 걱정이 커지더라고요.(웃음) 그리고 어린 시절 막연하게나마 의사가 되려고 생각했던 적도 있어 자연스럽게 치대 진학을 생각했던 것 같아요. 악기 연주도 그렇지만 어려서부터 손으로 하는 것에는 좀 자신이 있었거든요.(웃음)"

#유펜 치대 입학 사건

결심이 서자 마음이 바빠졌다. 치대 진학을 위한 필수과목 이수를 위해 뉴저지 포트리 자택 인근 대학에 편입했다. 고3 수험생이 따로 없었다. 오전9시부터 오후5시까지 꽉 채워 수업을 듣고 귀가 후에도 새벽까지 공부와 씨름해야 했다. 거기다 저녁시간엔 학생들을 대상으로 첼로레슨을 병행했다. 그렇게 독하게 공부한 덕분에 전과목 A를 받을 수 있었다. 늦바람이 무섭다고 공부도 크게 다르지 않나보다. 당시 대학입시 전문학원에서조차 지원을 포기하라고 했을 만큼 무모한 도전처럼 보였지만 그는 대학편입 1년도 채 안 돼 유펜(University of Pennsylvania)과 NYU 치대 두 곳에서 입학 허가서를 받았고 2001년 유펜 치대에 입학 했다. 그 후 그의 '유펜 치대 입학사건'은 맨해튼 음대 한국 유학생들 사이에 전설이 돼 몇몇 후배들은 그에게 치대 진학상담을 요청하기도 했고 실제로 한 후배는 그의 뒤를 이어 치과의사의 길을 걷고 있다고 한다.

물론 치대 4년여의 시간은 녹록지 않았지만 좋은 교수진과 동료들 때문에 그 어느 때보다 즐겁고 열정적으로 공부할 수 있었다고 한다. 대학졸업 후엔 UC샌프란시스코에서 보철전문의 과정을 밟던 중 아내와 자녀들을 데리고 2006년 겨울 LA로 왔다."10년 넘게 유학생활을 하다 보니 향수병이 생겨 LA에 왔는데 오자마자 향수병이 싹 사라졌어요.(웃음) 한인들도 많고 맛있는 한식도 실컷 먹을 수 있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웃음)"

#행복한 치과 쌤, 삶을 나누다

LA에 생활터전을 잡은 그는 웨스트우드, 샌타모니카, 팜데일 등의 치과병원에서 근무했고 2009년 초 LA한인타운 버질 길에 지금의 심포니덴탈을 개원했다. 유명 병원 인테리어 전문업체에 의뢰해 디자인에만 6개월이 소요될 정도로 공을 들인 심포니덴탈은 유명 메디컬 건축 매거진에도 실릴 만큼 세련된 디자인을 자랑한다. 이처럼 세련된 분위기와 첼로 선율을 닮은 윤 원장의 섬세한 진료 덕분에 심포니 덴탈은 금방 입소문을 타고 환자들이 늘면서 3년 뒤 건너편 빌딩에 2호점을 오픈하게 됐다. 확실히 남다른 감각의 인테리어에 감탄하며 그의 사무실을 둘러보던 중 한쪽 벽에 붙어 있는 한글 손편지 한 장이 눈에 들어왔다. 처음엔 말하기를 주저하던 그에게 전해들은 손편지의 사연은 조금 특별했다. 중년의 한 한인 선교사가 치과를 내원했는데 치료가 필요한데도 비용 걱정에 검사만 받고 그냥 가려는 걸 붙잡아 무료로 치료를 해 준데 대한 감사편지를 보내 온 것이란다.

"어휴 뭐 그리 대단한 일 한 것도 아닌데요. 다만 편지를 써 주신 마음이 너무 감사해 붙여 놓은 것뿐입니다. 환자의 40%가 타인종이긴 하지만 한인 환자들과는 설명할 수 없는 정서적으로 통하는 게 있거든요. 어르신들이 치료 후 감사하다는 말 한마디에 치과의사가 된 보람을 느끼니까요."

정답 없는 인생길, 그 누가 인생사 굽이굽이마다 정답지 꺼내어 확인하며 꽃길만 골라 걸어갈 수 있겠는가. 그러니 좀 돌아가면 어떻고 남들보다 좀 늦으면 어떠랴. 일견 먼 길을 돌아온 듯 보이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행복하다 말하는 이의 귀띔이니 한번 믿어 봐도 좋지 않겠는가.


이주현 객원기자 joohyunyi30@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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