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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도를 아십니까?

박재욱 / 나란다 불교아카데미 법사

아직 애젊은 두 스님이 서로 자신의 스승을 두고 자랑삼아 이야기를 주고받고 있다.

먼저 한 스님이 치기어린 허풍을 떨며 으스댄다.

"내 스승은 말일세 대단하셔, 도통하신 것이 틀림없어 아, 강둑에 앉아 강 건너 모래사장에다 내 법명을 쓰신다니까, 내 이 시퍼런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네".

듣고 있던 다른 스님이 애써 놀란 표정을 짓고는, 이내 자신의 스승에 대해 넌지시 자랑 아닌 자랑을 편다.



"그래? 대단한 분이시네그려. 음, 내 스승께서는 그저, 시장하면 잡수시고, 졸리면 그냥 주무셔, 뭐든 그냥 하셔, 나는 그처럼 자유로운 분을 뵌 적이 없다네".

신통방통한 도통이 한낱 '그냥'(평상심)의 자유 앞에 저리도 무참하니, 괜한 덧칠이면 '뱀의 발'이지 싶다.

어느 스님이 마조도일(중국 709-788)선사에게 "도란 무엇입니까?"하고 여쭙자, "평상심이 도니라" 답했다.

평상심시도(平常心是道) 이 선어는 그 후 제자인 남전과 조주선사로, 다시 한반도로 면면히 이어져 한국불교에서는 매우 귀중하고 요긴하게 여겨, 도의 궁극적 경지와 수행과정을 이 평상심에 두고 있다.

마조도일선사는 그 평상심을 조작 없는 무위한 마음이며, 옳고/그름, 좋고/싫음, 성/속 등의 이원적 분별과 그에 따른 집착을 떠난 마음'이라 풀어 밝혔다.

모든 유/무형의 존재는 인의 씨줄과 연의 날줄이 엮여 인연 생기한다는 것이 연기법이다. 이것이(선) 있어 저것이(악) 있고 저것이 있어 이것이 존재하게 된다. 즉 모든 존재는 서로 의지하고 관계하는 연기적 존재로써, 그것은 세계의 필연적 존재양태이다.

그러므로 대립적인 흑백 선택적 분별과 집착을 여윈 마음의 균형을, 어느 쪽도 아닌 '무입장의 입장'인 중도요, 평상심이라 하는 것이다.

역설적으로 양극단을 떠나면 둘 다를 수용하게 된다. 양극단은 인간의 경향성과 편견이 개입된, 단지 인식을 위한 자기이해이고 장치이며 방편일 뿐이다.

장미에는 싫은 가시도, 아름다운 꽃도 함께 있다. 그러나 있는 그대로 모두가 온전한 존재임을 깨달으면, 저마다 하나의 다른 면임을 알게 되어, 가시를 배척하지도 꽃의 아름다움에만 달뜨지도 않게 된다. 마침내 분별 등으로 오염된 마음은, 본래 그대로 온전하며 청정한 무위진인(無位眞人)의 마음으로 돌아가게 된다.

양극단 어디에도 마음을 두지 않는 그 '자리 없는 참사람'의 마음이 평상심이다. 따라서 일상의 하나하나, 지금 이 순간의 일체행위에 장애 없이 몰입할 수 있기에, 평상심은 평범하고 예사로운 일상의 마음이다.

결국 시장하면 그냥 밥 먹고, 졸리면 그냥 자는 평범한 일상인 평상심이 고스란히 도(道)인 것이다.

여기, 현실을 떠나 어느 신비한 곳에서 도를 구하거나, 구도의 길이 지팡이로 달을 치듯 지극히 어렵다고 여기는 이들의 마음을 일깨우기 위한 선시가 있다.

"평상심이 도이며/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진리이다/법(존재)과 법끼리는 서로 범하지 못하나니/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고려시대 백운선사)

musagusa@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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